강민우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

최윤의 소설 ‘회색눈사람’을 수업할 때 있었던 일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인 ‘안’이 지하조직의 멤버라는 줄거리 소개가 나온다. 시대 배경이 1970년대라고 얘기하는데 듣고 있는 아이들의 반응이 수상(?!)하다. 혹시나 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지하조직을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았다. 시대적 관련성은 무시하고 그냥 독립군 정도의 대답만 나왔어도 얼추 비슷한 맥락으로 읽는구나 싶었는데 나온 대답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조폭, 사채업자, 인터넷 불법 도박업자 등등. 

‘1970년대’ 지하조직이라 하면 군사정권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희생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내놓은 대답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고, 순간적으로 아이들과 내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현실 등을 얘기하면서 당시 지하조직은 조폭 세계가 아니었다는 억울한 해명을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장편의 수준을 넘어 『토지』, 『장길산』, 『태백산맥』 등 10권 이상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대하장편소설이 존재했다. 당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책들이었고 나 역시도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가 겪지 못한 일제 강점기, 조선 후기, 해방 전후 등의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시대적 흐름과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교사가 되어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졸업할 때가 되면 싹수 있는 애들에게 태백산맥 첫 권을 사 주면서 나머지는 사서 읽으라고 했었다. 대부분 어려워서 읽다 말았다고 했지만 개중에는 태백산맥은 물론이고 ‘아리랑’, ‘한강’까지 다 읽어 버린 제자도 있었다. 기특하게도.

하지만 요즘은 서사가 잘 안 통하는 시대인가 보다. 수업 중에 있었던 ‘회색눈사람 사건’을 얘기했더니 다른 선생님도 동감하신다. 20대가 가기 전에 아리랑을 읽고 찾아오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 주겠노라고 얘기했다지만 그런 아이들이 없었단다. 

아이들이 무관심하고 무식하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럴 생각도 없고 아이들을 비난하기 위해 쓴 글도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 그 시대를 인식하고 간접 체험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80년 광주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것은 독일인 기자가 당시를 찍어 놓은 화면이 그대로 ‘재현’되는 순간들이었다. 택시에서 촬영한 거리의 모습을, 도심 한복판에서 아리랑을 부르며 흥겨워하는 시민들의 낡은 기록 영상을 이내 영화가 그대로 재현하면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나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사실이자, 엄연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를 재생산하는 시도들은 꾸준히 있어 왔다. 택시운전사 말고도 ≪꽃잎≫,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26년≫, ≪스카우트≫ 등 기억나는 것만 해도 꽤 된다.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사회적 발언. 영화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지점이다. 

역사와 당대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발언이야말로 교사와 어른들이 학생과 아이들에게 꾸준히, 그리고 계속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다. 현실과 역사를 잊지 않고, 잇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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