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꼬마 물고기가 “무지개 물고기야, 네 반짝이 비늘은 정말 멋지구나. 네 반짝이 비늘 한 개만 줄래? 너한텐 굉장히 많잖아”라고 하자, 무지개 물고기는 도망가 버렸다. 그 뒤로는 아무도 무지개 물고기랑 놀려고 하지 않았다. 어릴 때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무지개 물고기’ 그림 동화책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작년 수강했던 강의에서 동화책을 통해 시민교육 요소를 분석하는 과제를 받았고, 나는 이 책의 표지를 넘겼다. 이 책은 상생과 나눔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책을 덮자 상생과 나눔과는 거리가 먼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 무지개 물고기를 피하는 것인가?’, ‘나눔과 배려를 강요받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콩 한 톨도 나누어 먹는다. 우리 속담에도 깃들어 있는 것처럼 배려와 나눔의 정신은 우리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미덕이라는 데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 야구장에서 공을 받으면 아이에게 줄 것, 아파트 관리 직원들의 명절 상여를 챙길 것, 문을 나갈 때 뒷사람에게 문을 잡아 줄 것. 이러한 모습은 마치 배려를 구체화한 말인 양 보인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젊은 놈이 안 비키냐?”라는 말을 듣는 상황, 야구장에서 공을 잡은 임산부가 아이에게 공을 주라는 관중들의 함성에 공을 빼앗기는 상황, 돈을 안 내면 관리 직원들이 현관문에 요청글을 붙이는 상황, 뒷사람의 문을 잡아 주지 않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앞사람을 쳐다보는 상황, 이 상황 또한 같아 보이는가? 이는 마치 무지개 물고기가 자신의 비늘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욕심쟁이로 비치도록 만드는 모습과 같다.
배려.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쓴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배려를 정의 내리기는 어려워 항상 이타성, 이타주의가 함께 등장한다. 행동의 목적을 자신이 아닌 타인의 행복과 복리의 증진에 두는 것을 일컫는다. 행동의 방향이 내 안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것이므로 삶의 지경이 자신 안에만 국한되어 있는 이가 아닌 나를 넘어 밖으로 향할 수 있는 이들에게 가능한 부분일 것이다. 이 때문에 배려는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이 자발성인 것이다.
너무도 선한 이 단어가, 이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배려가 ‘권리’가 되었고, 결국 ‘강요’가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배려를 강조하다 보니 배려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로 치부되어 다른 사람에게 이를 강요하는 일도 적지 않은 것이다. 배려의 영역은 배려의 가치로 남겨 두어야 한다. 감히 혼자 착하겠다고 남에게 배려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강요된 배려는 배려를 받는 사람들에게도 배려하는 사람에게도 제대로 된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이렇게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배려를 강요받는 상황이 지속되자,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사라지고 의심의 싹이 커져 혐오의 연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배려라는 그 기준 또한 매우 주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행동이 배려의 경계선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배려를 강요당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배려의 주체는 나이고 객체는 상대방이어야 하는데, 역으로 상대가 나에게 먼저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배려의 무게중심은 상대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려에 대한 단상을 끊어내야 할 차례이다. ‘당신의 배려’와 ‘나의 배려’의 관계 속에서 제 입맛에 맞는 선택적 배려만을 택하지 말자. 이건 양보와 배려라는 가면을 쓴 폭력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