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규(교육학·21) 학우
교육학을 하고 싶었다. 그런 흔한 학부 3학년의 사견을 풀어놓자.
비록 그 너비와 깊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을지라도, 사회적인 문제와 신학 그리고 철학은 당연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이었고 또 한때 내 전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고민을 거치다 보니, 내가 바라보아야 하는 영역은 이들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당시 고려한 교육이란 비단 학교에도 특정 기관에도 평생교육이라는 이름에도 한정되지 않았다.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라면 으레 있을 법한, 그런 식으로 서로를 일깨워 주고 서로의 실력을 끌어올리고 다시 베푸는 과정을 생각하였을 따름이다.
부푼 꿈을 안고서, 학과 하나만 보고서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교육이 무엇인지 파고들고 그에 기반하여 실천까지 나아감으로써 한 전체를 이룰 수 있으면 충분했다. “‘교육철학’에 기반하고 ‘교육심리학’을 이용하여 ‘교육과정학’과 ‘교육공학’을 구성함으로써 ‘교육정책학과 ’교육행정학‘에까지 나아간다” 따위의 말마따나 말이다. 이 중에서도 근본을 파헤치고 싶었다. 교육이 무엇인지, 그 무엇이라 판단하는 근저에 무엇이 자리하는지 그리고 자리하여야 하는지, 그 역동적인 상호작용 전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했다. 수업이나 정책은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따라 나올 뿐이었다.
입학한 후부터 나는 실망하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는 “교육학과”에 진학할 필요가 없었다는 허망함이니, 내 질문의 답을 들을 수가 없었던 연유다. 먼저로 교육학을 배우고 있지 않은 까닭이요 다음으로 교사니, 교직이니 하는 불요한 논의 투성인 까닭이다. 좋아하는 다른 분야를 내침은 교육학을 배우기 위함이었지 다른 논의에 천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또한 “――교육과”를 목표로 하지 않음은 학교니, 수업이니 하는 논의가 아닌 학문에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내용의 심화나 다양화로써 교직과목과 상이하여졌다고 하나 그 근본은 사실상 교직과목이었으며, 학문에의 길을 닦는다는 감각은 없었다. 요컨대 교육학을 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지인을 만나 전공에 관해 담소를 나누곤 하면 이 고민은 심해지면 심해지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과목에서 배운 내용을 저이도 알고 있으며, 또 다른 과목에서 배운 내용은 그이가 알고 있다. 그러니 자유전공 느낌, 넓은 지식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다니라는 조언은 결과로만 보면 일견 수긍할 만했다.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아니 말이다. 그런데 그럴 요량이었으면 자유전공 학부에 갔으리라. 이도 저도 아닌 꼴이다. 정리하면 자유전공 느낌으로 다닐 요량이었으면 자유전공에, 특정 분야였으면 그 학문에, 학교와 수업이었으면 “――교육과”에 갔을 테지 “교육학과”를 올 이유는 없었으리라. 예상보다 심한 형국에 전공 불만족도는 높아져만 갔다.
이제 학부 3학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학부 2년 또는 3년은 해당 학문의 기초를 닦지는 못했을지언정 맛은 보았다고 할 만한 시기이고, 학부생도 진지하게 재고하기 시작하니 만큼 학과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고작 학부 3학년의 말은, 오히려, 학부 3학년이기에 나름의 무게가 있다 하겠다. 학부생으로서 학부 과정의 의의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학부 과정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현상이 과연 온당한가? 이는 어디까지나 나의 저급하고 일천한 쓰레기 생각에 불과한가?
위 내용은 단지 학문을 하고 싶다는 관점에서만 서술한 바이다. 필자부터가 전부를 부정하지는 않고 나름의 의의를 인정하며, 적당한 끄트머리를 찾았다고 판단하였기에 여전히 재학 중이니, 본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라 하지 않는다. 요의는, 다만 그 구실이 전공의 학문성이 아님이 안타깝다는 데 있을 뿐이다. 결국 한 질문만 남는다. 나는 교육을 생각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