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찬(화학교육˙21) 학우
<그는 어둠 속을 걸었다>
- 헤르만 헤세
검은 수목들의 쌓인 그림자가 꿈을 식혀 주는
어둠 속을 그는 즐겨 걸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빛을 향한 타오르는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맑은 은빛 별들이 가득한
갠 하늘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이 시는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읽던 중 감명이 깊어 따로 표시해 두었던 시들 중 한 편이다.
어둠 속을 즐겨 걷는, 그럼에도 빛을 향한 욕망은 잃지 않는 시 속의 ‘그’는 어딘가 모르게 나와 비슷했다.
나는 21학번으로 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추억을 심어 두고 지금은 학교를 떠나 있는 휴학생이다. 말은 휘황찬란하지만, 난 그저 군인 아저씨일 뿐이다. 휴학하고, 군대에 있으며 인스타그램과 단체 채팅방 속에서만 피어나는 동기들의 학교생활은 마치 마약류 의약품과 같았다. 아직 이별에, 나의 빈자리를 인정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그 작은 화면으로 공유받는 나 자신을 혐오했다. 나라는 존재가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아직은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날 기억할 것이라는 희망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찬란한 존재들을 빛내고 남는 찌꺼기 빛에 불과했으며, 나는 더욱 거대한 광원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초창기 모습이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어둠에 익숙해졌다. 나는 나를 삼킨 그림자를 잉태한 압도적인 빛에 대한 질투와 동경에 사로잡혀 갔다. 그렇게 과거의 나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그토록 외롭던 까마득한 그림자가 광활한 사막 속 야자수가 만들어 준 쉼터와 같아진 것은 나도 모르는 어느 새였다. 아마도 그 순간은 시에서 말하는 ‘머리 위에 펼쳐진 별빛 가득한 하늘을 발견한 어느 때’가 아닐까 싶다. 극적이게, 태양과 같은 존재가 나타나 나를 뒤덮은 모든 그림자를 앗아 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미소를 자아내는 작은 성단, 감각을 간지럽히는 반딧불이와 같은 소중한 빛들의 잔잔한 파동이 나의 여유를 더욱 고무시켰던 것 같다.
이제야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분들의 작은 빛은 어디에 있나요?”
나의 소중하고 여린 빛은 내 주변에 변함없이 존재해 주었다. 훈련소에서 간절하게 기다린 몇 줄의 인터넷 편지에, 통화 기록과 카카오톡 메시지 함에, 휴가를 나와 남긴 사진 프레임 속에 고이 담겨 있는 것이다.
결국 큰 빛도 작은 반응들의 집합이다. 그렇기에 나는 모두에게 잠깐 주어지고 사라질 공공재의 빛을 독점하기 위해 욕심내지 않고, 오직 나의 곁에서 따뜻하게 비춰 줄 빛들이 꺼지지 않도록 포근히 안아 주고자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그 어리던 빛들도 모이고 모여 내 주위의 그림자를 점차 잠식시키지 않을까?
또 하나,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이 글이 실릴 신문은 17개월의 세월 동안 20회의 발행을 책임진 한국교원대신문의 편집장이 편집장으로서 발행하는 마지막 신문이다. 편집장이라는 무거운 자리에 앉아 한국교원대학교를 날카롭게 관찰하며, 그 누구의 편이 아닌 ‘신문사’의 이름으로 비판했다. 신문사의 일원이라는 점을 항상 자랑스러워하고, 한국교원대학교의 학생들이 학교를, 학생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아주 투명한 유리창을 선물해 주었다. 나에게 말한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의 방향성, “신문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길 바란다.”를 훌륭하게 이뤄 냈다고 생각한다.
이 친구도, 이 친구가 발행한 신문도 나에게는 ‘맑은 은빛 별들’이었다. 꾸준하게 빛나 주었고, 지금도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빛나줄 이 친구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항상 고맙다는 말을 이 독자의 시선 기고를 통해 전해 주고 싶었다.
글은 나의 수많은 작은 빛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시 한 편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 아이>
- 나태주
날마다 마음의 빛
어디서 오나?
그 아이한테서 오지
날마다 삶의 기쁨
어디서 오나?
여전히 그 아이한테서 오지
그 아이 있어
다시금 반짝이고
싱그러운 세상
그 아이에게 감사해
날마다 빛을 주고
기쁨 주는 그 아이에게 감사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