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으로 둔갑한 사람의 통치와 이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

발행: 2014. 3. 17.

오만한 제국(하워드 진),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 후불제 민주주의(유시민)
본 칼럼에는 위에 명시한 책의 핵심 부분을 인용하여 서술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법’은 왜 존재할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 저마다 다양한 의견이 나오겠죠. 예를 들어,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들어 ‘나라의 주권은 지도자가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제10조를 들어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 등과 같이 답변하여 법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법의 긍정적인 측면들만을 배워왔으며 살아가는 데 있어 맞닥뜨리는 모든 것을 정연하게 유지해주는 것이 바로 법이라고 알아왔습니다. 법은 질서를 유지해주고, 폭력을 처벌하며, 민권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법에라도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며 복종하지 않는다면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에 불복종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힘들여 만들어낸 것이 법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렇다면, 혹시 이 사건을 아세요? 1955년 12월부터 그 이듬해까지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지역의 흑인들은 인종차별에 대한 철폐를 외치며 버스 보이콧 항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버스 승차를 거부했고 비폭력 시위를 통해 지속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00년대부터 몽고메리 시는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을 분리시키는 ‘법’이 있었습니다. 또한 백인 전용 버스정류장인 ‘White waitng room'이라는 장소도 존재했습니다. 미국의 ‘법’에는 백인을 우월하게 여기는 인종차별적인 사상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고 이러한 사상이 가져온 행태는 법이라는 사회적 신(神)에 의해 그리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정부의 명목적 변명 아래 공공연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로자 팍스라는 흑인 여성이 백인 전용 좌석에 앉고선 일어나라는 기사의 지시에도 응하지 않아 결국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에 분개한 흑인들이 마틴 루터 킹을 의장으로 하여 보이콧 항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안정과 질서만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조건은 아닙니다. 몽고메리 보이콧 투쟁이 일어났던 당시 미국에서는 대다수의 백인 국민들이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소수의 흑인 국민들은 매일매일 겪는 차별과 무시에 울분을 품고 이를 갈았습니다. 사회에는 질서도 필요하지만 ‘정의’도 필요합니다. 정의란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고 자유와 번영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은 물론 일시적으로 질서와 평안을 가져올 수도 있으나, 정의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법은 그 자체로써 신성화해야 할 강령이 아니라 이러한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법의 조문들이 신성화될 수 있는 이유는 법이 사람의 통치와는 별개인 중립적인 요소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라고 통칭되는 사람도 법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법은 ‘사람’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통치를 하는 주체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법을 만들고 법을 가장 잘 아는 권력있는 사람들은 법을 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여러 법률과 규칙들을 이용하며, 법을 마음대로 바꾸거나 위반할 수 있는 정부기구의 권력을 빌립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는 도덕과 정의의 법이 아닌 그보다 훨씬 낮은 차원의 법, 즉 국민들을 쉽게 통제하고 속일 수 있는 법이 얼마든지 살금살금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시민불복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당한 법이 있을 수 있지만, 부당한 법 역시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의 부정함은 투표라든지 연설, 투고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변하는 기색이 안 보입니다. 즉 제도 안에서의 저항은 잘 티가 안 납니다. 제도를 벗어난, 부패한 사회를 내보이기 위한 극적인 법률 위반 행위를 우리는 ‘시민불복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을 뛰어넘은 저항은 민주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여기에는 붕괴와 말썽이 뒤따르지만 그것은 필요한 붕괴이고 유익한 말썽입니다. 투표와 언론 기고, 시민운동 등 겉으로 보았을 때 우리의 민주주의는 잘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생사의 문제에 근접해 가면 갈수록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는 더욱더 반민주적으로 변모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의견조차 묵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산 참사와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문제 등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시민불복종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바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있었던 5·18 민중항쟁입니다. 5월 18일, 전남대 학생들의 데모에 뒤따른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은 광주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진압 행태에 대해 ‘정치적 음모’, ‘간첩’, ‘지역 감정’ 등을 내세운 유언비어론을 퍼뜨리며 마치 자신들이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처럼 포장하여 국민들을 속이는 동시에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당시 지배층이었던 신군부는 도저히 언어로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을 행사했고 그 치부를 가리기 위해 각종 궤변을 늘어놓아 국민들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바닥까지 추락시키는 공수부대의 행동은 광주 시민들이 보기에 정말 끔찍이도 정의를 말살시키는 행위였습니다. 공수부대의 잔학한 행동 뒤에서 전국민들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는 정부에게, 광주 시민들은 도저히 복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복종’했습니다. 그들은 폭력에 대한 공포와 폭력을 외면하는 자신에 대한 수치를 동시에 느꼈고, 결국은 이를 이성과 용기로 극복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부가 내세우는 미개한 법이 아니라, ‘정의’라는 고차원적 가치를 위해 똘똘 뭉친 이들은 결국 ‘절대공동체’를 이루어 냈습니다. 또한 이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신분과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 인격적이고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러한 시민불복종자들의 용기는 그 뒤에 일어난 6월 민중 항쟁 등 여러 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신군부의 부정한 정치적 행동들은 심판받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역사적인 사건을 찬찬히 살펴보았을 때, 어떤 한 국가가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이러한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고뇌하고 싸우고 헌신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민주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고,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헌헌법이 제정된 후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를 후불하기 위한 희생과 헌신은 꾸준히 이루어져왔고, 그 수단 중 하나로 5·18민중항쟁과 같은 시민불복종이 택해지기도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민주적인 ‘법’이 존재한다고 해서 온전히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법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적용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당한 요소가 끼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의식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는 시민들 각자가 ‘나 또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권 의식을 가짐과 동시에 부정한 법과 정책 혹은 정부의 지시에 저항할 수 있는 탄탄한 지식과 뜨거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강한 불복종은 당장은 붕괴를 낳고 말썽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유익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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