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맹학교 채명숙 교사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나이 50이 넘어도 지속해서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2022년 3월 9일, 나는 53살이다. 올해로 교육 경력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평소 존경하는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으면서 또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사춘기보다 무서운 갱년기인지라 요즘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 유시민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자기 삶은 자기가 설계해서 사는 게 행복해 보인다는 표현을 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되짚어 보고자 한다.
198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특수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려운 살림에 서울까지 유학 보내 준 부모님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의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름 힘겹게 번 돈을 하숙비, 학비 대느라 고생하셨지만 나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에게는 철없는 소리도 했었다. “왜 능력도 없으면서 4명이나 낳았냐고?” 지금 생각해 보니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는 소리다.
대학 4년을 마치고 나는 충주에 있는 시각장애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남동생이 고려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남동생의 하숙비를 보태 달라고 해서 서울에 남아서 학교에 다니면 남동생 하숙비 보내기가 버거울 것 같아서 그나마 서울에서 가까운 충주성모학교에서 대략 10년 정도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학교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이 너무도 바쁘게 흘러갔다. 23살 신임교사는 학생들 데리고 가야금 수업, 영어 수업을 하기 위하여 퇴근하고 가야금, 장구, 아쟁 개인지도를 받았고, 초등학교 3학년에 처음 도입된 영어 수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건국대학교 어학원에 매일매일 도장을 찍으며 원어민 선생님께 영어 회화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사실 나는 미국으로 유학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건대 어학원 수업을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다녔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다른 건대 학생들은 원어민 영어 수업에 결석하였지만 나는 학생들과의 영어 수업을 위한 것도 있고 내가 미국에 가서 석사 박사 코스를 밟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원어민 선생님과의 영어 수업을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 국가 대학에서 전환 교육 석사 코스를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때 당시 석사 코스에서 통역 없이 자유롭게 미국인 교수님과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서 미국에서의 석사 과정도 즐거웠다. 나는 공부를 더 하겠다는 마음으로 부모님께 미국에서 석사 박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여자가 무슨 공부냐?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 드세진다. 아홉수 넘기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 나를 들들 볶으셨다. 친정아버지는 내가 한창 잠들어있는 새벽 4시 5시 6시에 수시로 전화해서 시집가라고 닦달하였다. 교단에 들어선 지 대략 5년쯤 지나니 혼자 사는 게 지겹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시집가라고 다그치는 부모님 등쌀에 나는 미국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을 법한 남자를 선택하여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97년 11월이다. 결혼생활은 생각보다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11월에 결혼하고 12월에 첫아이가 생겼고, 남편과 나는 대전과 충주 주말부부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뇌졸중으로 아프셨던 시어머니를 모시던 막내 도련님이 갑작스럽게 사고로 죽는 바람에 병든 시어머니를 내가 모시게 되었다. 내가 시어머니를 모신 기간은 3년 정도였다. 그런데 그 기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또한, 내가 특수교육을 하면서 장애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버거운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시기였다. 그때의 경험이 특수교육을 하면서 내가 장애 부모님들에게 “이렇게 하셔야 합니다. 장애 아이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이렇게 하시라고요” 요구했던 일들이 장애 부모님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유시민 작가는 이 책에서 사는 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보건복지부 장관도 하고 유명한 책의 저자인 유시민 작가 같은 사람도 살면서 도망가고 싶은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기도 하였다. 실은 나도 시어머니 병간호를 하던 시절에 너무 힘들어서 미국으로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딸과 아들 때문에 차마 도망가지 못했다. 아마도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갔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시고 나는 뒤늦게 경인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를 했고, 석사 하는 동안엔 친정아버지는 뒤늦게 시작한 딸의 공부를 위하여 나에게 간암 말기라는 소식도 알리지 않고 아프시다가 저세상으로 가셨다. 돌이켜보니 그렇게 공부하고 싶어 하던 딸의 앞길을 막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암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도 나에게는 하고 싶은 공부 하라고 하셨다. 지금도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너무도 가슴 아프게 보낸 친정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가슴 한구석이 시리고 아프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울컥울컥 와르르 눈물이 쏟아진다. 너무나도 보고 싶고 그립다.
2012년 내가 담임을 한 초등학교 5~6학년 8명의 학생과 EBS 다큐 프라임 학교 8부작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에 내가 고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6개월 정도 우리 교실에서 시각장애 전맹과 저시력 학생들이 우리들의 눈과 협업을 하며 미술 수업을 하였다. 2012년 태국 치앙마이 The Elephant Nature Park에서 7월 21일부터 7월 25일 4박 5일간 현장 체험학습을 하였다. 코끼리에게 먹이도 주고 목욕도 시켜 주고 도자기 흙을 이용하여 아이들이 체험한 다양한 코끼리를 만들었다. 그 체험학습에 참여했던 제자가 우석대학교 특수교육과 4학년이 되었다. 2022년 5월 우리 학교에서 교육실습을 하고 갔다.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전맹 친구가 수업 연구를 하기 위하여 고민하고 애쓰는 모습이 참 대견하다.
올해가 나의 교육 경력이 30년이 되는 해이다. 시각장애 전공을 선택하면서 임용 고시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30년 교직 생활에서 내가 실시했던 다양한 교육 경험들(국립특수교육원 현장 연구위원, 초등영어, 점자 익히기 심의, EBS 다큐 프라임 ‘학교’ 8부작 코끼리 만지기 프로그램 참여, 시각장애 미술교육 현장과 확산 가능성을 위한 한·일 포럼 발표, 충청북도 정보화교육원 주최 학교를 변화시키는 18분 강연) 덕분에 나는 한국교원대학교 특수교육학과에서 시각장애 학생 교육 강의를 하게 되었다. 강의를 처음 하는 나는 2021년 12월부터 강의 자료 준비에 매달렸다. 최근의 시각장애 학생 교육에 대한 동향이나 다양한 동영상 자료를 찾아 보며 강의 자료와 ppt를 만들었다. 내 나이가 50이 넘다 보니 노안 증상이 나타나 컴퓨터 화면의 글자가 흐리게 보이고 점점 내 눈의 상태가 악화하였다. 내가 시각장애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도 생겼다. 그래서 충남대학교 병원에서 상반신 CT, 핵융합 검사도 했다. 다행히도 시각장애는 아니고 비루관협착증으로 눈물길 막힘 증상이라고 한다. 시력 손상은 없는 간단한 시술이라고 한다. 시각장애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소설을 쓰며 얼마나 불안한 시간을 보내었는지, 이번 일을 계기로 시각장애인 선생님들에게 좀 더 친절해야겠다고 반성을 하였다. 우리 아이들이 늘 앞을 보지 못하는 불편을 느끼고 평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아프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시각장애 전맹 체험과 저시력 체험, 점자 쓰기를 실시하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장애 체험 소감문을 읽으면서 나는 학생들이 장애 체험으로 인해 느끼는 바가 내가 원했던 특수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또한, 학생들에게 스승의 날이라고 수강생들이 직접 쓴 손 편지를 받았다. 손 편지 받는 순간 너무도 감격하여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집에 도착하여 학생들이 준 손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기쁨의 눈물을 또 쏟아 놓았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강의로 진행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강의를 했었는데 걱정과는 달리 대면 수업을 할 수 있었고, 학생들도 강의 계획서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장경험이 미미한 수강생들에게 생생한 특수교육 현장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나는 강의에 대한 준비도 더 많은 시간을 내어 준비하게 되었다. 평생 시각장애 학생들만 대상으로 수업을 하다 보니 학생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수업하는 게 쉽지 않아서 늘 여러 번 고민하며 수업을 했었는데, 강의를 이해하는 수강생들의 강의 참여 태도나 강의 집중도에 나는 매번 감동하게 되었다. 또한, 강의하러 가는 수요일이 일주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강의하기 전에는 과연 내가 3시간 연속 강의를 잘할 수 있을까? 불안함과 설렘으로 시작했던 강의가 6월 8일 종강을 하였다. 종강하고 나니 시원섭섭하며 아쉽다. 지금도 수요일 2시가 되면 한국교원대학교 교양학관 311호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내가 평생을 해 온 시각장애 학생 교육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수업전략이나 내가 교직 생활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개할 때면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의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이 나를 게으르지 않게 다스리는 계기가 되었다. 2학기 특수교육 개론, 교단 수필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수시로 던져 본다. 그런데 명확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2020년 친정어머니가 밭에서 쓰러지셔서 내가 갑작스럽게 친정으로 가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남청주 나들목 근처, 청원가구마을에서 짐 실은 가구 트럭에 받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큰 외상은 없었으나 내 몸은 온갖 통증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몸의 회복을 위하여 2022년 4월 펜싱을 배우게 되었다. 수요일 강의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잠깐 쉬고 8시부터 9시 30분 토요일 9시부터 10시 30분 주 2회 4~6월 꼬박 3달을 배웠다. 그리고 6월 25일 대전체육회 주관으로 펜싱 꿈나무 동호인 대회 에페 종목에 참가하였다. 53살 처음 배운 펜싱으로 인해 개인전 대회에도 참가했다. 아쉽게도 8강에서 탈락하였다. 발목 부상으로 한 달을 쉬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 그래도 53살에 도전해 본 결과가 만족스럽다. 나에게 주어진 나머지 삶에 대하여 여전히 물음표이다. 아직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이 많다. 또 어떤 것에 매달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놓을지 모르겠다.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길을 찾아 나는 떠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