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동성애자는 변태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제3의 성이 있을 수 있습니까?” 9월 28일, 2022 개정 도덕과 교육과정 시안 검토 공청회에 참석한 한 학부모의 발언 내용이다. 이날, 공청회는 진행이 어려웠을 만큼 고성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일부 참석자들이 그토록 강하게 요구했던 바의 골자는 ‘성평등’이라는 표현을 ‘양성평등’으로 바꾸고, 사회적 소수자에서 ‘성소수자’를 삭제하라는 것이었다. 이후 있었던 사회과, 기술·가정과, 보건과 공청회 역시 비슷한 논점에서 일어난 거센 항의로 파행을 겪어야 했다.

“저는 우리 아이에게 혐오를 가르칩니다. 혐오는 인간이 알아야 할 감정인데 그걸 왜 나쁘다고 가르칩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고 있는 말이, 그리고 그 속에 짙게 깔려 있는 감정이 ‘혐오’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혐오가 정당하다며, 그것을 서슴없이 표출하곤 했다. 대학에 와서 처음 참석한 공청회에서 나는 이들의 혐오를 직접 마주하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그리고 이들의 혐오가 우리 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국내 혐오 연구의 권위자인 홍성수 교수는 혐오를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는 태도”라고 정의한다. 싫어하는 것에는 그 이유가 존재한다. 즉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 태도 등을 싫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혐오는 ‘이유 없는 거부’이다. ‘그들이 한 어떠한 행동이 자신에게 피해를 줘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이라서’ 싫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과 사회로부터 배제하고자 하는 감정이 곧 혐오다.

혐오 또한 인간이 알아야 할 감정이라는 학부모의 발언은 분명 타당하다. 다만 혐오의 대상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어떠한 사람도 그가 사람이기에 혐오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를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로 구분한다. 원초적 혐오란 신체의 배설물, 사체와 같이 인간이 꺼리는 특성을 공유하는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이와 달리 투사적 혐오는 그 혐오스러운 특성을 사람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즉, 원초적 혐오의 속성을 노인, 장애인, 이주민, 난민과 같은 특정 집단의 속성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혐오의 화살은 주로 약자와 소수자에게 향한다. 누스바움은 “원초적 혐오는 근절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투사적 혐오는 공정한 사회에 위험을 초래한다”라고 경고한다.

우리 사회가 오래 전부터 관습적으로 답습해 오던 ‘양성평등’이라는 표현 역시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육받을 권리는 2세대 인권인 사회권에서 출발하는 권리이다. 인권 보장의 차원에서 만들어져 체계화되고 발전되어 온 교육이 인권을 지닌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용어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것에 대한 시대적 자성으로부터 교육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교육을 해야 할까. 앞으로의 교육은 이 혐오의 시대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 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주체라는 것이다. 교과서에 들어 있는 단어 하나, 교사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학생들에게 혐오의 씨앗을 심게 되고, 그 학생은 평생 동안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부모가 되어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 혐오를 그대로 가르칠 것이다. 이것이 혐오의 메커니즘이다. 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대물림되고 재생산되어 반복된다. 교육이 변화하지 않는 한, 이 혐오의 굴레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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