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영어교육·17)
포우의 소설들은 ‘인간 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탐색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광기, 생매장, 환영, 살인, 죽음과 같은 어두운 소재들이 주를 이루며 공포의 분위기가 텍스트 전체에 펼쳐진다. 그러한 배경에는 1790년대에서 1850년대까지 미국 문학계에 퍼져 있던 고딕양식의 유행을 들 수 있다. 새로운 나라 미국은 문화적 토양을 유럽대륙에서 약간 빌려왔고, 직간접적으로 영국과 유럽대륙의 고딕 전통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 요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포우는 단지 고딕 양식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광기에 사로잡힌 존재들의 환각과 정신 분열적 양상 등 인간의 심리영역을 반영시켰다. 포우는 인간의 의식보다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인 듯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절반은 광기 상태에 있고, 아무리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언제든지 광기로 변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래서 포우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신경 질환자이거나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위태로운 존재들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은 주로 광기, 원초적인 본능, 괴팍한 비이성적인 힘에 좌우되어 살아 나간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이 작품도 주인공 로데릭 어셔가 느끼는 우울증, 죄의식, 공포감, 파멸에 대한 두려움을 잘 묘사하며 독자를 공포 분위기에 초대한다. 이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 ‘어셔가’는 작품의 지리적 배경인 집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어셔 가문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어셔가’는 더 나아가 주인공 로데릭의 영혼이나 정신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신체적으로 병을 앓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심한 병을 앓고 있다. 어셔가 건물 외벽에 있는 균열은 주인공의 심리적, 도덕적 결함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작품의 끝에서 어셔가가 허물어지는 것은 한 가문의 몰락을 상징할 뿐 아니라 주인공이 심리적 파산 상태를 맞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름도, 자세한 배경도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어릴 적 친구인 화자가 아픈 친구 로데릭의 요청으로 어셔가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화자는 어셔가라는 폐쇄된 세계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존재로서 이성적 질서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광기에 잠식되어 가는 로데릭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화자가 오는데, 화자는 어셔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성적,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로데릭의 광기를 완화시키는 자신의 방법에 원인과 결과라는 합리적 설명을 부여하며 이성적 접근을 시도하려고 하지만 이성을 대변하는 듯 보이는 화자는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작품의 초반에 그는 어셔가로 들어가기 전에 주위의 음산한 풍경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렇듯 화자는 로데릭의 광기에 이성으로 대항하는 듯 보이지만 공포나 환상에 전염되기 쉬운 예민함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이성만을 중시하여 결국 자신 안의 한쪽만을 인정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로데릭 또한 모순적 양상을 보여 준다. 그의 시 ‘유령궁’에서는 그의 이성 중심주의적 사유가 드러나는데, 시 안에서 이성은 빛나는 것이며, 드높은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시의 존재 조건은 바로 로데릭의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이다. 이 시가 즉흥시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에서 로데릭의 감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 준다. 결국 표현하는 내용은 빛나는 이성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은 로데릭이라는 시인의 감성이다. 그러나 로데릭은 자신의 병적인 과민한 감각과 환상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을 느끼게 하는 감수성을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과민함이 이성을 위협하고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로데릭은 자신 안의 이성을 중시하는 부분과 시인으로서의 감성 중에서 오직 하나에 가치를 둔다. 따라서 화자처럼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대립적 관계로 인식하며 하나의 가치만을 우위로 삼는 모순을 저지르게 된다.
집안 이름이 대대로 가문의 남성에게 전해지면서 로데릭 어셔와 어셔 가문, 그리고 가문의 건물은 하나가 된다. 이름을 통해서 세 개의 존재가 하나의 정체성을 얻는 것이다. 이름은 가문이나 집이라는 남성 중심적 체제에서 남성이 남성 자신의 위치를 지정하는 정체성, 자의식, 혹은 동일성을 부여받는 기제가 된다. 로데릭은 어셔가의 이름을 가지면서 어셔가의 중심이 된다. 그를 중심으로 어셔가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 서열이 매겨진다. 로데릭 어셔와 어셔 가문 그리고 어셔가 건물은 동일시된 정체성을 갖는다. 이 세 개의 가치는 어셔가라는 세계에서 중심축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매들라인과 화자, 주치의, 하인, 시종이 있다. 존재의 서열에서 드러나는 타자화의 극단적 현상은 하인과 시종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 건물이 로데릭과 동일시된 정체성을 얻으면서 그들은 건물보다도 존재성이 없는 존재가 된다. 이야기는 로데릭과 어셔가 건물의 불길한 분위기로 시작해서 붕괴까지의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하인이나 주치의는 사물보다 못한 것으로 전락한다. 어셔가가 붕괴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인과 시종의 몰락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름을 갖지 못한 타자는 극단의 소외를 겪는 듯 보인다. 이들은 이 작품에서 극단적으로 소외된 존재다.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져 내려온 어셔가의 폐쇄된 남성 중심주의 세계에 경계를 흐리는 존재는 매들라인이다. 로데릭에게 있어서 매들라인은 성별은 다르지만, 얼굴이 닮은 쌍둥이다. 그리고 여동생이면서 연인이라는 근친상간적 암시도 드러난다. 살아있지만 유령처럼 묘사되는 매들라인은 남성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에서 이분법적 경계를 흔들 수 있는 불순하고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불순한 공포의 대상은 급기야 하인처럼 침묵 당한다. 매들라인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며, 화자가 그녀에 대해 알게 되는 사실들은 오로지 로데릭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 침묵에 의한 타자화 외에 그녀는 로데릭의 공간에서도 격리된다. 어셔가의 집 안에서 중심 공간은 로데릭의 방이다. 로데릭이 있는 공간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남성 중심사회 속 가장의 공간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매들라인은 이 공간의 문턱을 절대로 넘지 않고 방 안의 로데릭과 화자에게 공포를 주며 유령처럼 지나칠 뿐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로데릭은 결국 매들라인을 생매장한다. 로데릭의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경계적 존재를 밀폐된 어둠 속에 차단하는 것이다. 그는 정상의 체제를 오염시킬 수 있는 애매한 혼돈을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경계 흐리기의 공포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매들라인과 같은 타자는 정상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환치된 우리의 소외된 욕망, 우리 안의 타자라고 볼 수 있다. 매들라인을 생매장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 안의 어떤 욕망을 괴물화하며 소외시킨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우리 자체를 소외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경계 흐리기의 공포인 매들라인을 생매장했지만 로데릭은 더 깊은 광기와 공포에 사로잡힌다. 매들라인처럼 어둠 속에 갇힌 타자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기회만 생기면 변형된 형태로 직간접적 충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래서 무의식 속에 생매장된 욕망은 타인에게 투사되기도 하고, 혹은 인간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서 주체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둠 속 깊은 곳에 생매장된 욕망들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주체 내부에게 혼돈과 공포감을 주면서 강력한 지진을 일으킨다. 매들라인은 피 묻은 수의를 입고 로데릭에게 유령처럼 나타난다. 지하에 갇히기 전, 그녀의 소리는 차단되었었다. 그녀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오로지 집 안의 중심인 로데릭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의 소리를 찾는다. 소외당한 타자는 봉인된 관을 열고 격렬한 신음을 내며 로데릭이 두려워했던 경계를 넘어 그의 방으로 들어오면서 로데릭은 죽음을 맞는다.
어셔가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온 남성 중심주의의 사회다. 중심주의는 중심에 선 자가 중심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낸다. 중심이 타자를 밟고 중심에 서면서 그 안에서 타자들은 소외되고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생매장되기도 한다. 이렇게 중심주의는 중심과 그 나머지의 경계를 가르며 사회 내에 폭력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폭력을 당한 타자들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공동체의 외부가 아닌 내부 안에 자기 붕괴의 원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셔가의 몰락 또한 자기 붕괴의 원인을 갖고 있다. 가문이 오랫동안 구현해 온 중심주의의 가치들, 스스로를 감금 상태에 가깝게 분리시킨 끔찍한 폐쇄성, 중심에서 먼 존재들과 경계를 흐리는 자들에 대한 폭력성, 타자화 등이 바로 어셔가의 자기 붕괴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는 붕괴하는 어셔가에서 살아남은 화자가 어셔가를 삼킨 검은 호수를 응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셔가를 처음 들어갈 때의 모습과는 달리 어셔가에서 많은 일을 겪은 화자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화자가 어셔가를 정신없이 탈출하며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검은 호수를 바라본다. 검은 호수는 몰락한 어셔가를 품은 ‘죽음의 물’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는 화자에게는 ‘생물의 물’이 될 수 있다. 화자는 검은 호수라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삶과 죽음은 독립적인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