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화(화학교육·20) 학우

무심코 시계를 봤는데 같은 숫자만 있는 시간이 보일 때가 있어. 111, 222, 333. 이상하게 444분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지 않고, 555분은 또 기분이 좋단 말이지. 그런,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는 숫자가 있지 않니.

또 어떤 숫자가 있을까. 그래, 생일도 있겠다. 내 생일 숫자를 시계에서 발견한 그 1분 미만의 시간 동안 생일에 관련된 모든 것을 떠올려. 그리고 1분이 바뀌어 다음날이 되면 다시 시계에서 눈을 떼고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거야.

한적한 오후에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는데, 아직도 한낮이길래 문득 몇 시인지 궁금해졌어. 날이 풀리고 해도 길어진 것 같은데, 하고 전자시계를 봤더니 416분이구나. 이제 나는 다시, 여지없이 2014416일로 돌아가.

*

 

8년이 흘렀다. 2014년 이후로 나는, 매년 3월 말부터 한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감정을 느끼고선 달력을 확인하고 다가오는 4월을 맞이한다. 계절성 우울증과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한 해도 빼먹지 않고 부지런하게 나와 내 주변인들을 괴롭혔다. 왜 이렇게 기분이 엿 같지. PMS인가, 아닌데, 나 생리는 이번 주에 끝났는데. , 4월이야. , 4월이구나. 또 돌아왔구나.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날은 중간고사 시험대비를 한다는 명분으로 동아리방에서 선배들과 밤을 새기로 했었다.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 수업을 자체휴강하고 SNS를 하다 페이스북에 공유된 게시글로 처음 소식을 접했다.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가려고 탔던 배가 침몰했다고 했다. 승객들 전원이 구조됐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으나, 그것은 모두 오보였다.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고 의견을 추가해서 게시글을 공유했다.

인권운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 선배들과 뉴스를 지켜봤다. 팽목항에서 취재되었다는 기사가 우후죽순 올라왔다. 어떤 민간인 잠수부를 인터뷰한 내용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 잠수부의 신상이 인터넷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그는 삽시간에 희대의 악녀가 되었다. 그가 사실은 잠수부조차 아니라는 낭설이 떠돌았다. 모두 근거 없는 소문이었고, 416일 하루종일 온 국민이 그를 욕했으나 417일이 되자 잠잠해졌다.

학생회에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 함께 나갈 학우를 모집했다. 나는 전공 시험을 치르고 저녁에 시청광장으로 향했다. 처음에 외치던 구호는 아이들을 살려 내라,” “아이들을 돌려 달라였다. 트럭 위에 올라간 학생회 선배들은 쉬어 터진 목소리로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쳤다. 당시 선장이 가만히 있으라고 승객들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에 기반한 구호였다.

5월이 지나자 구호들은 세월호를 인양하라,” “특별법을 제정하라로 진화했다. 이에 대한 온갖 정치적 낭설이 나돌았다. 어디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민주당 세력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어디서는 이들이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그저 불쌍하고 순진무구한 시민들이라고 주장했다. 유가족들은 외부의 프레임에 납작하게 갇혀 여타 다른 정체성은 상실한 채 세월호 피해 유가족만이 되어야 했다.

2015년이 되었고, 416이 다가왔다. 나는 시청광장을 출발해서 분향소에 가는 경로의 시위에 참여했다. 20144월 이후 경찰의 방패는 언제나 시위대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은 국화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집회는 언제나 누군가 격앙된 목소리로 청와대로 향합시다!”라고 외치는 것을 신호 삼아 진압 정도가 격해졌는데, 2015416일도 여지없이 똑같은 신호탄으로 집회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찰을 간신히 따돌리고 분향소에 도착해 헌화를 했다. 경찰에 쫓기는 동안 국화는 이미 목이 부러져 덜렁덜렁한 상태였다. 분향소에 헌화된 대부분의 국화들은 내 국화와 비슷한 상태였다.

 

이후 사람들은 4월이 아닌 날에도 종종 416을 떠올렸다. 영화 엑시트에서는 보습학원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구조되었고, 영화 벌새에서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살아가다 길에서 노란 리본을 단 가방을 보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노란리본이 없는 가방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란 리본을 옮겨 달았다.

416의 흔적은, 문득 문득 가슴에 진하게 떠오를 것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날의 무력함, 상실을 여지없이 느낄 것이다. 남현철 학생, 박영인 학생, 양승진 선생님, 권재근씨, 그리고 권혁규군 모두가 돌아오더라도 내 가방엔 항상 노란 리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나의 노란 리본을 본다면, 당신 또한 당신의 416을 떠올릴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416연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온라인 기억관에는 아직도 세월호를 기억한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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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17분이 되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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