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강의를 들어가든 “예비교사” 혹은 “선생님”으로 불리지 않거나 “학교에 가게 될 테니”라는 말을 안 듣는 때가 더 희귀하다. 작년부터 스무 개 남짓하는 강의를 들으며 이 경험은 학기 중 매주 되풀이되었다. 교원대 학생 대다수가 교원을 직업으로서 희망하기에 이 현상은 필경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하지만 필자는 이것이 자연스러워선 안 된다는 주장을 실험적으로 내세워 보고자 한다.
교원대는 교육학과를 제외하면 모두 해당 분야의 교원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는 학과인 목적형 대학이다. 그렇기에 교원이 될 생각이 없는 자는 교원대에 진학하지 않는다고 쉬이 결론짓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양한 사람이 교원대에 진학하고, 혹자는 재학 중의 경험으로 교원의 길을 접거나 고민하기도 한다. 예비교사라는 호칭으로 일괄 지칭하는 현상은, 예비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신하는 이들 간의 결집을 강화하는 부차적 효과를 낳는 동시에 그렇지 않은 이들을 언급에서 제하여 버린다. 다른 길을 고민하는 이들을 뒷전으로 밀어버린다.
위 배제 현상은 학교의 폐쇄성을 강화하는 형태로도 드러난다. 교원대는 유아·초등·중등·특수로 대상이 확대되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교대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질적인 학생들이 작은 규모에 모여 있다는 점 ▲이외의 환경 등을 고려할 필요성을 적게 느끼게 하는 점 ▲모든 학문이 교육학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히 더 그렇다. 그리고 교원대는 이에 사범대도 더해져서 교대와 사범대의 한계를 모두 지닌 듯하다. 이런 문화는 예비교사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데서 다시 고착화되고 굳어진다.
교대 한계 지적은 2005년 교대발전연구회 시안 발표 당시 서전화 전국교육대학원장협의회 회장의 발언, ‘대학교육’ 174호에서의 허종렬 교수의 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작년 12월에는 소규모 동질 집단이라는 교대의 한계 극복이 교원양성체제 발전방안의 주요 과제로도 올랐다. 사범대도 특별히 다르지는 않은데, 장환영(2012)은 신진연구자지원사업 결과보고서에서 사범대 교육과정의 폐쇄성이 사범대생의 이중적 불안을 가중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서재영·최원석(2019)은 사범대생이 다른 직업을 고려하지 않는 현상을 지목하며 “사범대의 분위기가 폐쇄적으로 흐를 우려”가 있다고 꼬집었다.
예비교사라는 정체성으로 강화되는 부정적 측면은 비단 다양성을 지우는 데 한정되지 않는다. 직업으로서의 교사를 정체성으로 확고히 하면 할수록,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제한되고 왜곡된 모습을 나타내기 쉽다. 같은 민주시민성교육을 표방한다 하더라도 ‘직업인으로서의 교사’ 정체성을 가진 이와 ‘교육을 중요시하는 시민’ 정체성을 가진 이의 양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를 우선시하게 되면 "이런 교육이 중요시된다"라는 인식에서 생태교육이나 평화교육의 틀을 짜나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육을 중요시하는 시민을 우선시하면, 거칠게 말해 선후가 뒤바뀐다. 예로서,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라는 추동이 “그럼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지”로 이어지는 식이다. 인식의 영역에서, 전자는 ‘교육활동으로서의 문화 형성’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사고가 갇힐 수밖에 없다. 반면 후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여러 활동을 두루 검토하여 변혁의 총체하에 교육활동을 생성해나간다. 교육을 중요시하는 시민이 상상하는 ‘교실’은 더 큰 그림의 일부가 된다.
직업인으로서의 교사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교육활동을 통해서는 절대 시민을 우선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비밀스레 박히는 사고의 틀은 생각보다 사람을 더 크게 휘어잡는 데다가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옮겨가니 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교원양성교육은 자체로서도 성립하는 교육인 동시에 학생교육에도 영향을 끼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김갑성, 2008). 확장되지 못한 정체성과 사고방식은 수업시간에서의 구현에만 집중하도록 변질되어 교실을 새로운 영토로는 이끌어내지 못한다.
물론 필자라고 하여 위 한계 밖의 개체는 아니다. 그렇기에 한번 더 주장해보고자 한다. 최소한, 예비교사라 타칭·자칭하며 한계 속으로 계속해서 가두는 행태만은 벗어나고자 해야 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