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T로 유명한 영화라고 하면 ‘위대한 쇼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개봉 직후 OST가 빌보드 차트에 올랐고, 국내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이 영화는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바넘은 알면 알수록 모순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고, 우리는 바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예술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 돌이켜보자.
◇ 영화 속의 바넘, 위대한 쇼맨
영화 ‘위대한 쇼맨’은 근대 서커스의 창시자인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넘은 회사의 무역선이 침몰해 부도로 실직되자, 관련 서류를 몰래 가지고 나와 바다 아래에 있는 무역선을 담보로 잡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빌린 돈으로 희망차게 박물관을 열었지만, 박물관에는 먼지만 날렸다. 이에 바넘은 다른 방법을 찾다가 어렸을 때 본인이 좋아하던 ‘노래’와 ‘공연’을 떠올린다. 찰나의 생각은 ‘지상 최대의 쇼(The Greatest Show On The Earth)’ 기획으로 이어진다. 바넘은 자신과 함께할 서커스 단원을 꾸리기 위해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이들과 함께 서커스를 개최한다. 남들과 다른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외면당하던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춤과 노래로 관객과 교감하기 시작했으며 바넘의 쇼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중간에 여러 걸림돌을 마주하지만, 결국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바넘이 다시 쇼를 이어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 평등을 추구하는 엔터테이너?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단지 장애가 있다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바넘의 유언이다. 바넘의 서커스 단원은 주로 기형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바넘은 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특히, 수익의 분배와 계약에 있어서는 서로 조율해 가며 공정하게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덕분에 단원들과 임금 관련 문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원들 또한 당시 사회에서 외형 때문에 천대받던 자신들이 관심을 받고, 돈을 벌고,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해 준 바넘에게 호의적이었다. 인생 후기에, 바넘은 사회적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당시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를 거세게 비판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미국 최초의 비영리 병원과 각종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 거짓으로 위장한 희대의 사기꾼?
바넘은 돈에 대한 열망이 강해 거짓 마케팅으로 관객을 끌어모았다. 유명한 일화로, 80대인 조이스 헤스라는 여성의 나이가 160살이 넘는다고 속인 것이 들통나자, 위기의 순간에서 바넘은 다시 거짓말을 한다. 조이스 헤스는 고래의 뼈와 고무 등으로 이루어진 인조인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심지어는 헤스가 죽고 나서 사체를 해부해 증명하겠다는 무리한 약속을 하면서까지 관객을 모았다. 또한, 헤스를 더 늙어 보이게 만들기 위해 술을 먹이고, 일부러 밥을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등 가혹한 행위를 일삼았다.
바넘의 거짓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숭이의 상체와 연어의 뼈를 교묘하게 조립해 인어를 발견했다는 등 갖가지 기이하고 엽기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관심을 끌었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돈에 대한 그의 집착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쇼를 위해 장애나 기형이 있는 사람을 고용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단원들을 돈벌이로 이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거짓말과 과장으로 관객을 끌어모으고 단원들을 학대하면서까지 쇼를 기획하고 운영한 그를, 마냥 ‘위대한 쇼맨’이라고 미화할 수 있을까?
◇ 당신이 예술을 즐기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영화 ‘위대한 쇼맨’의 가장 마지막 스크린에 나타나는 “The noblest art is that of making others happy(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다)”라는 바넘의 말은 그의 예술관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고상하고 명예로운 것만이 예술이고, 그 예술이 더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위대한 쇼맨’을 재미로 즐긴다면,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에 충실하게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준다. 이들은 웅장한 규모의 쇼에 압도되고, 음악에 사로잡히고, 꿰뚫는 메시지에 감동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위대한 쇼맨’을 바넘을 미화시킨 영화로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각색된 작품의 실제 사례를 중시하며, 보는 것을 넘어 비판적인 시각으로 감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부류일 것이다.
예술을 즐기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정답도 없다. 사람마다, 장르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형식에 따라 즐기는 방식이 모두 다르겠지만 각자의 방식을 찾아 감상한다면 예술을 즐기는 재미가 두 배가 될 것이다. 나만의 예술 감상 포인트를 찾아, 방법을 규정하지 말고 더 큰 가능성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두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