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명의 김용균이 발생했다. 

여느 날과 비슷하게 이선호씨는 평택항 부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하청노동자였다. “뭘 뽑아야 하니 도구 좀 갖고 작업 현장으로 와달라”는 원청의 요청이 들어왔다. 개방형 컨테이너의 양쪽 날개를 접기 위해 안전핀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3년간 컨테이너 작업을 했던 현장 노동자 A씨는 선호씨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A씨가 안전핀을 일부 제거하자, 지게차 기사 한 명이 컨테이너 양쪽 구멍에 들어간 나뭇조각을 주우라고 말했다. 그는 원청 소속이었다.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지시라 A씨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기사는 주우라는 제스처를 계속 취했다. 선호씨가 결국 나뭇조각이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나뭇조각을 빼내려는 순간, 맞은편 지게차 기사가 선호씨를 보지 못한 채 컨테이너 한쪽 날개를 접었다. 날개가 접히는 진동의 여파로 선호씨 위에 있던 반대편 날개가 쓰러졌다. 쿵. 300kg의 날개가 선호씨를 덮쳤다.

예견된 참사였다. 선호씨는 안전모도 없이 작업 현장에 투입되었다. 평소 하던 업무가 아니었음에도 안전 교육을 받지 못했다. 컨테이너도 이상했다. 제대로 된 개방형 컨테이너라면 한쪽 날개가 접혀도 다른 날개가 함께 접히는 일은 없어야 했다. 하지만 선호씨가 일하던 컨테이너는 사고 발생 8일 전 검사에서 정상 판정을 받았다. 노동 배경은 불법으로 가득했다. 선호씨는 하도급업체 ‘우리인력’의 직원이었지만 사고 당일 원청 ‘동방’의 지시를 받았다. 현행법상 원청이 하청 노동자를 파견 직원처럼 지휘ㆍ감독하는 것은 불법이다. 동방과 우리인력은 계약마저도 하도급 계약이 아닌 인력 공급 계약을 맺었다. 하도급 계약은 원청업체가 하청업체에 일감을 맡기고, 이를 끝낼 것을 목적으로 맺는 계약이다. 두 업체 간 계약서에는 하도급할 업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 계약서 이름 자체도 ‘인력공급계약서’였다. 조정이 쉬운 인력 공급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이러한 계약은 불법이다. 선호씨를 포함하여 불법 계약을 맺은 다양한 인력이 노동 현장에 투입되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소통이 안돼 위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컨테이너 날개를 접었던 기사는 우리인력 소속이 아닌 자영업자 기사였다. 선호씨가 컨테이너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다. 그렇게 죽음의 날벼락이 떨어졌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용돈 받기가 죄송한 마음에 아버지를 따라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돈을 모아 자취방 월세를 내고 간식도 사먹었다. 컨테이너에 간 그날은 시험 기간이라 노트북과 공책을 챙겨 갔다. 쉬는시간 틈틈이 공부를 하려던 참이었다. 주머니엔 막 보았을 시험지가 구겨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와 너무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을 그의 죽음에 마음이 무너진다. 시금치 나물을 무쳐놓고 선호씨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거짓말하지 마라며 울부짖었다. 아들과 장난치며 행복하게 출근하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와 그 죽음을 밝히고 있다. 오래도록 도사리던 위험의 외주화가 한 가족의 희망을 앗아갔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다시 뜨거워졌다. 그러나 ‘누더기’, ‘늑장’이라는 수식이 붙는 입법 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경영책임자의 의무와 이행사항의 범위를 축소하고, 책임소지를 자르려는 황당한 움직임은 낮짝을 뜨겁게 한다. 

며칠 전 전공 시간, 후기 자본주의를 배우는 데 헛웃음이 나왔다. 당시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영역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지식, 감정, 소통 등 순수하고도 인간적이어야 할 영역 곳곳에 자본주의가 스며들었다고 한다. 이익에 눈이 먼 사회에서 선호씨의 목숨은 한낱 가루가 되었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인간적이어야 하는 영역이 있단 말인가. 가장 기본적인 존엄조차 이익의 손길로 다루는 사회에 말문이 막힌다. 당연해야 할 진상규명과 중대재해처벌법은 당연하지 못하다. 이익으로 외면하는 사회에 인간다워야 함을 호소해야 한다. 삶과 죽음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밝게 빛나던 청년은 깔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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