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11일은 상호존중의 날이다. 1=1, 구성원 모두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뜻을 담은 날짜 선정이다. 식품진흥원, 공무원연금공단, 각 시도교육청 등 다양한 공공기관이 이날을 맞아 각종 내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각 기관의 상황에 맞게 갑질 근절 교육을 실시하고, 홍보 캠페인을 실시한다. 담당자들은 상호존중의 날을 지정해 운영하는 이유가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들고 청렴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갑질 사건이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이후로 국가 기관에서부터 평등과 존중을 강조하는 추세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는 이러한 추세와 먼 곳에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올해 1월 졸업한 학교에는 물티슈를 가지고 다니면서 입술을 지우라고 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치마 길이 단속 역시 3년 내내 빠지지 않았다. 때로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계단 위에 전신 거울을 두고 학생들에게 윽박지르는 일이 있기도 했다. 교육청에서 치마 길이를 규제하지 말라는 권고가 내려왔고, 이사장과 담당 선생님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어난 일이다. 비단 내 모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인권단체 홈페이지를 이곳저곳 들어가 보면 여전히 학생인권조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현재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지역은 경기,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제주로 총 6곳이다. 물론 경남과 인천처럼 조례 추진의 움직임을 보이는 지역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생각해봐도 17곳 중 6곳은 많지 않은 숫자다. 지금은 2021년, 경기도에서 처음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고 벌써 10년하고도 1년이 더 지났다.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내용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각 시도교육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이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고 있다. 학생들은 나이나 학업 성취도, 종교, 성별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조례는 체벌을 금지하는 내용과 두발, 복장 규제를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당 조례에는 학생의 참여권을 보장하는 내용도 있다. 학생회의 자치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특히 서울시 조례의 경우는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첫 학생인권조례였다.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을 나열해두었다는 느낌이 든다. 조례가 굳이 필요한지 의문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이 조례는 학교 내에서 학생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인권과 존중, 평등을 가르치는 공간의 규칙은 여전히 반인권적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 A 여자중학교에는 ‘교복 안에는 흰색 속옷만 입어야 한다’는 학칙에 근거해 속옷을 포함한 복장 검사를 하겠다는 방침이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반발해 포스트잇 시위, 임시 대의원회 개최 및 건의 등의 방법을 통해 학칙 개정을 이루어 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이 학교의 사례는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강도는 약해도 비슷한 규정이 어디에든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반인권적인 교칙은 이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당한 교칙이 있는 모든 학생들에게 이러한 운동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학생인권조례는 그래서 필요하다. 학생인권조례라는 큰 틀이 있었다면, A 중학교의 학생들이 덜 소모되는 방향으로 교칙의 개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를 향한 걱정스러운 시선이 있음을 안다. 학생인권조례가 도입되면 학생 지도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현장 교사들의 우려는 항상 존재했다. 이러한 목소리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교사와 학생들이 처한 현장의 상황을 고려해 조례를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교권과 학생인권은 양립 가능하다. 하나가 잘 지켜지면 하나가 지켜지지 않는, 반드시 한 쪽으로 기울어야만 하는 저울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조례 제정을 향한 과정 자체도 쉽지 않음 역시 알고 있다. 조례에 무슨 내용을 담을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성적 지향’, ‘임신 또는 출산’ 등의 단어를 두고 다양한 단체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발의, 의결, 공포, 효력 발생의 과정을 거치는 데에 걸리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도 학생인권조례의 제정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서류로 된 그 짧은 문건이 현장에서의 인권 보호의 시작일 수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한 청소년인권단체에서 ‘청소년도 사람이다’, ‘학생인권조례 즉각 제정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교복을 입고 꿋꿋이 거리를 지키던 또래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활동가들은 똑같은 내용을 시에 요구하고 있다. 부산 A 중학교의 일은 불과 2018년의 일이며, 치마 길이 단속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은 내 모교뿐만이 아니다. ‘인권’, ‘평화’, ‘존중’이라는 가치를 교과서에 납작하게 눌린 단어로 접하는 일은 이제 그만둘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가치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언제까지고 20세기의 악습을 반복할 것인가?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하루빨리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