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시인의 눈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멋진 인생은 없을 것이라며 뿌듯한 미소를 짓곤 했습니다.
“할미꽃이/ 비를 맞고 운다./ 비가 얼마나 할미꽃을 때리는동/ 눈물을 막 흘린다.”(안동 대곡분교 3년 이성윤, ‘할미꽃’ 전문) 비오는 날 무심코 지나칠지도 모르는 할미꽃을 한 아이가 유심히 바라봅니다. 고개를 떨군 할미꽃에서 슬픔을 느낀 아이의 시선처럼, 시인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합니다. 삶을 멈추어 바라보고, 귀기울이고, 느낍니다. 초등학교 시절, 나무 한 그루를 매일 살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시인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하나 둘 터지는 꽃봉오리는 벅차도록 기뻤고, 싱그러운 초록빛들에 마음이 시원해졌습니다. 빨강 노랑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땐 서글프더니, 나뭇가지 위 보들보들한 눈은 포근했습니다. 어린 시인이 바라본 세상은 경이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내 주변엔 소중하고 반짝이는 존재들이 참 많구나, 하루하루 감탄하며 살았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시인의 눈은 점점 넓어졌습니다. 요즘은 보이지 않는 슬픔에 더 멈춰서게 됩니다.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사회를 잠식시키던 시기, 이안 시인은 TV에서 미선나무의 꽃말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세상없는 명의가 끊어준 처방전” 같았지만 “슬픔 없는 인생 역시 희망 없는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하며 돌아섰습니다. 얼마 뒤, 마트에서 꽃기린의 꽃말을 본 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두 꽃말을 두고, 시인은 펜을 들었습니다.
“엄마, 꽃집에서 적어 왔어//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건 미선나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이건 꽃기린.// 둘을 붙이면,// 모든 슬픔이 사라진 다음에도/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 엄마, 우리 이 말 기르자”(이안, ‘사월 꽃말’ 전문).
“미선나무를 심을 땐,// 가지 하나를 잘라/ 갖고 있자// 모든 슬픔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슬픔 하나는,/ 잘 말려서 갖고 있자”(이안, ‘사월 꽃말 2’ 전문).
슬픔에 멈추는 시인의 눈은 얼마나 중요한가. ‘사월 꽃말’ 속 아이와 엄마를 보고 새삼 깨닫습니다. 미선나무의 꽃말처럼, 슬픔이 모두 사라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잊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4월 16일에 멈춰, 잘라두었던 노란 가지를 꺼내봅니다. 꽃처럼 예뻤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떠올리고, 가라앉은 배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늘의 아이들이 억울하지 않은지, 땅의 아이들이 안전한지, 멈추지 않고 주시하며, 세상을 조금씩 바꿔갑니다.
슬픔이 없는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은, 슬픔을 사랑하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슬픔을 느끼며, 눈부신 행복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지난 13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참사, 재난·산재 참사 유가족·피해자들의 기록과 증언회’가 열렸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사망 사고, 가습기살균제 참사, 세월호 참사, 이한빛PD 사망 사건, 김용균 노동자 사망 사고, 한국마사회 고 문중원 기수, 한익스프레스 남이천물류창고 신축현장 산재사망 사고... 지난 18년 간 발생한 17개 주요 참사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사무치게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참여자들은 서로가 ‘재발방지와 안전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임을 확인했습니다. 당시의 대응을 차분히 짚어보고, 참사들이 남긴 과제를 살펴보며,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 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정호승,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일문)
바쁜 삶이지만, 시인의 눈으로 천천히 살아가보려 합니다. 슬픔에 귀기울이고, 묵묵히 느끼려 합니다. 어둠 사이로 반짝이는 행복에, 눈물 머금고 미소 지으려 합니다. 언젠가 세상을 처음 본 아이처럼, 경이와 기쁨에 가득 차 웃어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