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 이조은 선임간사
우리는 하루에 만 보 정도 걸으면 정말 많이 걸었다고 한다. 과로로 돌아가신 어느 택배노동자의 만보기에는 5만 보가 찍혔다. 평지도 아니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무거운 택배물량을 들고 5만 보를 걸어야 한다. 살인적인 노동강도다. 누군가의 1만 보 걸음은 건강의 길이지만, 누군가의 5만 보는 죽음의 길이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에서 택배노동자는 숨은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과로사에 이를 정도의 살인적인 노동시간을 감내하며 일해오고 있다.
작년 9월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주최한 <택배 과로사 실태조사 및 대안 마련 토론회>에서 발표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택배노동자의 가혹한 노동현실을 수치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택배노동자의 연간노동시간은 약 3,700시간. OECD 국가 중 세 번째로 길다는 한국 노동자 연간노동시간의 두 배에 달한다. 장시간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고도 많이 당한다. 사고재해율 또한 한국 노동자 평균의 50배 이상이다. 믿을 수 없이 참담한 수치다. 실태조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택배노동자는 초장시간 노동과 건강상의 위험에 심각한 수준으로 노출되어 있다. 그렇게 작년 한 해에만 16명의 택배노동자가 과로사로 명을 달리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가 파악하지 못한 과로사는 더 많을 것이고, 돌아가시지만 않았을 뿐이지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택배노동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다행히 택배노동자의 안녕을 걱정하는 시민의 지지와 연대에 힘입어, 올해 1월 21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를 위해 노사정 등 택배산업 관계단위들로 구성된 ‘사회적 합의기구’가 과로사방지 대책에 합의했다. 사회적 합의기구가 발표한 1차 합의문에는 장시간 노동의 핵심원인이자, 택배노동자 전체업무의 40%나 차지하는 '무임금 분류작업'을 택배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명시됐다. 반복되는 과로사를 막을 수 있는 중요한 걸음이었다. 사회적 합의기구는 1차 합의 이후에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방지를 위해 택배 불공정 거래구조 개선하고, 택배비를 현실화하기 위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1차 합의에 따라 택배사가 분류작업을 온전히 책임지려면 택배산업 체질을 개선해야만 한다.
이외에 남은 과제가 많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경계에 있는 것으로 취급되는 ‘특수고용노동자’인 택배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노조할 권리도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 택배노동자들의 많은 노력 끝에 택배노조가 설립됐지만, CJ대한통운 등 원청택배사들은 우리는 사장이 아니라며 교섭을 회피하고 있다. 심지어 원청택배사들은 노조 조합원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서 불이익을 주고, 조합원이 많은 대리점을 폐쇄하는 등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는 시도를 반복해왔다. 누군가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택배노동자가 스스로가 원청사업자와의 교섭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어야 실질적인 과로사 예방이 가능하다. 국회와 정부가 나서서 택배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노조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이유다.
최근 강동구 고덕동 그라시움 아파트에서 택배차량의 지상출입을 막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택배차량의 지상출입 금지와 택배노동자와의 대화 거부는 아파트 입주민대표자회의가 내린 이기적이고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거주민 모두가 갑질을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주민 상당수는 택배노동자의 과로사에 마음 아파하고, 택배노동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평범한 시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파트 거주민과 택배노동자가 대화를 통해 충분히 합리적인 대안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주문한 택배물건이 누군가를 착취하며 배송되기를 아무도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라시움 아파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택배노동자 과로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사회적 합의기구가 2차 합의문을 잘 도출하고, 합의문을 차질 없이 이행해서 택배물건을 배송하는 노동자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려면, 택배노동자에 대한 시민들의 꾸준한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택배노동자의 희생과 헌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택배노동 환경을 만들어야 우리 사회가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여연대와 함께 더 많은 시민이 택배노동자 곁에 서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