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지난 7월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교육부의 고위 공직자가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이른바 개, 돼지 발언이 보도되면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민중이 누구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한국인의 99%라고 답했다. 결국 파면 당했지만 그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대학 구조개혁과 같은 교육부의 굵직굵직한 정책을 만드는 정책기획관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을 더했다. 지금도 99%의 한국인들은 모욕감에 치를 떨고 있다. 파면으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발언은 인간 비하를 넘어 뭔가 불길함을 느끼게 한다. 언론 보도를 보면 그는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발언을 먼저 했다. 나름 논리가 있었던 것이다. 한국도 신분제가 확립되어야 하는 데 국민 대다수가 개, 돼지이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그는 단순히 국민을 모욕하기 위해 개, 돼지를 거론한 것이 아니다. 지배와 피지배, 즉 권력의 논리가 그 배후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탐구하는 동물의 역사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밝힌다. 기원전 8,000년 경 농업혁명은 식물 재배뿐 아니라 동물을 가축화했다. 많은 학자들은 동물의 사육이 인간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동물의 지배는 인간들 사이에서 권위주의를 강화했다. 노예제와 가부장제가 그 예다. 최초의 농업의 흔적이 발견된 지역에서 노예의 첫 증거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예제란 동물의 가축화가 인간에게로 확장된 것이 아닌가?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 길들이기는 동물을 사육하면서 시작된 것은 아닌가? 동물을 가축화했던 경험을 활용해 여성의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고 순결과 성적 억압을 강요한 것은 아닌가? 동물의 가축화가 남성에게는 폭력의 훈련장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거세, 낙인찍기, 채찍질, 족쇄 채우기 같은 동물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된 방식들이 노예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이유는 무엇인가? 민중은 개, 돼지이기 때문에 신분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교육부 고위 공직자의 논리 역시 같은 맥락이지 않는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흔히 상대방을 동물로 폄하한다. 그 증거는 역사상 도처에서 발견된다. 찰스 패터슨의 명저 「동물 홀로코스트」는 수많은 예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백인들이 원주민을 개, 돼지, 늑대, 뱀, 원숭이, 고릴라, 오랑우탄이라고 불렀다면 히틀러는 유대인을 “사람들의 피를 천천히 빨아 먹는 거미, 피 흘릴 때까지 싸우는 쥐 떼, 다른 사람의 몸속에 있는 기생충, 영원한 거머리”라 폄하했다. 그 결과가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대인을 향한 제노사이드였다는 사실은 역사가 입증한다.
그런데 나치의 경우는 훨씬 급진적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동물로 폄하했을 뿐 아니라 ‘동물화’ 작업을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나치 수용소는 유대인들의 동물화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수감자들의 고통은 무자비한 폭력과 추위와 굶주림, 질병 등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사실상 나치 수용소는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체계적으로 박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표현처럼 나치 수용소는 “생물학적, 사회학적 실험실”이었다. 유대인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해 학살의 죄책감을 지워버리려 한 것이다.
나치 수용소가 시도한 인간의 동물화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는 수수께끼 같은 수감자들을 탄생시켰다. 생존자들의 증언이 이를 반증한다. 이들은 “선과 악, 고귀함과 미천함, 지성과 무지를 구분할 의식의 공간마저 상실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틀거리는 시체이며 극심한 고통에 빠진 육체적 기능들의 꾸러미다.” 프리모 레비의 표현은 더 처절하다. “그들을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죽음을 죽음이라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우린 개, 돼지... 넌 국가의 내장에서 세금 빨아먹는 십이지장충.” “국가도 가끔 구충약을 복용해야 한다.” 교육부 고위 공직자의 개, 돼지 발언에 맞선 한 저명한 지식인의 반격이다. 통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뭔가 개운하지 않다. 그 반격이 자칫 우리 모두를 동물화 하는 악순환에 말려들게 한다는 기우 때문일 것이다. 개, 돼지 발언 앞에서, 먼저 동물에 대한 착취와 고통을 줄여야 한다고 답한, 「잡식가족의 딜레마」의 감독 황윤이 문제의 본질에 더 다가서 있다. 동물을 향한 폭력, 인간을 향한 폭력은 서로 뒤얽힌 채 나치 수용소로 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기자명 김용우(역사교육) 교수
- 입력 2016.11.22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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