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훌쩍 지나 설레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지는 요즘. 미뤄둔 과제들이 쏟아지고, 무서운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종강이 간절해지는 시즌이다. 며칠 전 부랴부랴 과제 하나를 끝냈다. 국어 과목 언어와 매체매체 자료의 비판적 수용단원을 수업 시연하는 것이었다. 수업을 들어가기에 앞서, 아이들이 왜 비판적 수용을 해야 하는지 느낄 수 있도록 대본을 써보았다. “매체가 기술적으로 발전하면서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어요. 전문가뿐만 아니라 누구나 쉽게 매체 자료를 생산하고 이용할 수도 있게 되었죠. 하지만 동시에 부당한 관점, 부정확한 정보들이 광범위하게 우리의 일상에 파급될 수 있는 위험성이 생겼어요. 이 위험성을 인지하여, 매체 자료를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해요.”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알고리즘.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파급력. 빛의 속도로 전환되는 수많은 옵션들. 수업을 준비하며 떠올린 매체의 마법같은 특성에 새삼 놀라기도 했지만, 그 위험성은 서늘한 공포로 다가왔다. 아주 빠르고, 치밀하고, 무서운 무기 하나가 내 손에 쥐어진 것 같았다. 감각적이고도 편리한 세계 속에서 모두가 신나게 매체를 향유하는 와중, 이 마법같은 매체로 협박을 당하고, 인격이 베이고, 피가 멎지 않는 상처를 안게 된 여성들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장악력으로 수많은 여성들의 몸과 성을 착취한 살인자들이 하나 둘 선고를 받았다. 징역 40. 숨막히는 헤드라인이 좀 전 눈앞을 스쳐갔다.

텔레그램 성착취 단체 대화방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은 수십명의 여성을 협박하여 성착취 영상물을 만들었다. 입장료에 따라 착취물을 배포하고, 수천명의 구성원들과 여성의 성을 갖고 놀았다. 20대 초반 최지수(가명)는 불어나는 대출 이자와 밀린 월세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 300~600만원을 한 번에 지급한다는 구인글이 트위터에 반짝였다. 당장 텔레그램에 가입하고, 문의를 시도했다. 박사라는 계정의 남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젊은 호감형 목소리의 그는 돈이 바로 지급되는 스폰 알바를 제안했다. 최지수는 박사가 연결해주는 매칭남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분증, 계좌번호, 연락처를 전송했다. 그리고 곧 폭스밤이라는 매칭남이 연결되었다. 그때부터였다. 폭스밤의 요구는 뭔가 잘못되어갔다. 처음에는 새끼손가락을 펴고 얼굴 사진 몇 장을 찍을 것을 요구하더니, 나중에는 나체 사진을 요구했다. 때마침 박사에게도 연락이 왔다. 사진을 보내면 폭스밤이 자신에게 보낸 160만원을 바로 전달해주겠다고 했다. 최지수는 나체 사진과 가슴 사진 7장을 폭스밤에게 보냈다. 폭스밤의 요구는 더욱 기괴해졌다. 속옷을 머리에 뒤집어쓴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그가 망설일 때마다 돈이 바로 계좌에 들어갈 것이라는 박사의 설득이 더해졌다. 최지수는 고민 끝에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사에게 전화가 왔다. “X, 좋게좋게 하자. 얼른 영상 보내. 돈 안 받고 싶냐?” 그는 이미 돌변해 있었다. 그는 나체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비는 영상을 찍으라고 했다. 최지수는 답하지 않았다. 박사는 최지수의 SNS 친구 목록 사진을 보내고, 친구들에게 나체 사진이 갈 것이라고 협박했다. 최지수는 황급히 비밀 대화방에서 나와 텔레그램을 삭제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지금 텔레그램에서 지수씨의 사진이 유포되고 있으니 더 이상 박사에게 사진을 보내지 말라는 메시지가 그를 옭아맸다. 최지수의 나체 사진은 이미 박사방에서 수천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최지수의 몸을 품평하고, 더 가학적인 영상을 요구하며, 최지수를 노예로 부리는 박사를 추종했다. 박사만의 범죄였을까. 인간의 행위라고 볼 수 없는 이 범죄는 n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수많은 범죄자들이 거대한 텔레그램 조직을 형성하고, 여성, 청소년, 아동의 성을 착취하고, 관전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치밀한 범죄 속에서 피해자들의 존엄은 처참히 짓이겨졌고,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에 스스로를 버리고 노예가 되어야 했다. 무기징역. 징역 40. 소년법 최고형 징역 10. 사회가 그들에게 행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은 형벌이다. 하지만, 몸과 인격을 버려야 했던 수치스럽고 처참한 기억, 범죄의 압도 속에서 느꼈을 숨막히는 공포와 고통, 그곳에 멈춰버린 피해자의 시간 앞에서, 형벌의 숫자들은 맥없이 나가 떨어진다. 보이는 범죄가 아니라서? 수사에 협조해서? 그들의 행위는 살인이었다. 인격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삶을 핏빛으로 물들인 행위였다. 그 행위를 두고 당신들은 최고의 처벌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그 더디고도 박한 처벌로 피해자들의 사라진 삶을 돌려놓을 수 있는가. 처벌에 안도하는 범죄자 당신들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마다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들이었다. 이유를 대지 않아도 소중하고, 고귀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아등바등 뿌리내리고 살아가던 꽃들 사이로 보이지 않는 영악한 혀들이 스몄다. 치밀하고도 놀라운 시스템으로 무장한 혀는 꽃들을 찌르고, 베어내고, 쑥대밭이 된 꽃들의 죽음을 병적으로 만끽했다. 어디까지 스며있을지 모른다. 그 혀들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쓰러진 꽃들 아래 토양을 다지고, 서서히 새싹이 돋을 수 있도록 온기로 꽃들을 지탱하는 것이다. 안정된 봄이 돌아올 때까지 온 사회는 기다려야 한다.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 모든 꽃을 지키는 가장 날카롭고도 치밀한 칼을, 어둠의 혀에 돌려야 한다.

내 손에 쥐어진 마법의 매체에는, 아직도 꽃들의 피가 흥건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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