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미 파견교사 (불어교육학 전공)

어릴 때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 놀이를 하고, 막내 동생에게 학습지를 만들어주고 채점하기를 좋아했던 나의 오랜 꿈은 선생님이었다. 꽤 괜찮은 학창시절을 보내며 운이 좋게도 훌륭한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나의 어릴 적 꿈을 키워나가 교육대학교에 합격하였다. 교육학이나 교과교육 수업을 듣는 것은 지루할 때도 많았지만 1년에 한 번 교육실습을 나갈 때는 굉장히 설렜다.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교실에 들어설 때 아이들의 기대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길을 받는 순간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선생님들의 수업을 참관하고 실습록을 작성하며, 실습생들과 함께 공동 수업안을 짜고 공개수업을 준비하는 것은 기분 좋은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실습 기간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눈물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고 교생 선생님들은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 때 내 마음은 하루 빨리 교육현장에 나와서 진짜 내 학생들을 가르치고, 온전히 마음을 쏟고 싶었다.

임용시험에 합격하고 처음 교육 현장에 들어선 2014, 나는 6학년 보람반(3) 담임교사가 되었다. 다행히도 학생들은 나를 좋아해주었고 나는 그동안 꿈 꿔왔던 나의 교육적 야망을 펼쳐나갔다. 조금, 아니 많이 서툴렀지만 온 마음을 다해 학생들을 사랑했고 욕심이 많았던 터라 24명의 보람반 아이들과 정말 지지고 볶았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여러 추억들을 만들면서 1년을 보냈다. 감사한 첫 해를 보낸 뒤로 교직 생활 5년 동안은 동료 교사와 학급 관리 등으로 갈등도 있어보고, 업무분장으로 감정도 상해보고,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학생을 데리고 병원에도 뛰어가보고, 마음이 아픈 학생을 맡으며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룬 밤들도 있었지만 나름의 경험과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작년, 교직생활 6년 차 학교를 이동하며 교직의 매운맛을 경험하고 말았다. 전입하는 시기였기에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는 각오를 했지만, 다른 선생님들이 모두 기피했던 학년을 담당하게 됐고, 여러 선생님들의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3월을 시작했다. 내가 교직생활에서 변치 않고 가졌던 신념은 진심은 통한다였는데, 그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학생, 학부모 할 것 없이 사고가 터졌다. 3월부터 학교폭력이 발생해서 학급 세우기를 할 여유가 부족했고, 한 달 동안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지 않은 학생 학부모들 사이 어딘가 쯤에서 외로이 모든 것을 받아냈다. 그러다보니 건강에 이상이 왔고 한 쪽 귀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학교에서 무리하게 요구하는 사업들, 협력이 잘 되지 않는 것만 같은 동료 교사들, 이상만 가득한 관리자,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 어느 하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내 나름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영상편집프로그램을 구입해서 아이들과 학교폭력예방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공모전에도 나가보고, 매월 학급 자치회에서 체육대회, 영화 관람, 다과회 등 다양한 행사를 계획해서 해보기도 하고, 다양한 교실 놀이를 배워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캠페인도 해보고, 플래시몹 공연도 해보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보기도 했고.. 내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무색하게 한 쪽을 메우면 다른 두 쪽이 금가버리는 깨진 항아리 같은 교실 속에서 나는 마지막에는 항복을 선언했던 것 같다. 그토록 꿈꿔왔던 선생님이란 직업을 오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때였다. 몸도 마음도 지친 날들을 보내며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생각이 될 때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잠깐 교직생활에 휴식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알아본 것이 교원대 파견이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한 번에 합격해서 선생님이 아닌 학생으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며 지내고 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학교 생각도 하기 싫고 멀어지고만 싶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망가졌던 신체 기능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고 잊어버릴 만한 것은 잊어버리면서 내 마음도 치료가 되는 중이다.

지금도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충분히 노력했던 걸 내 스스로가 알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낸 이유는 단지 내가 그곳에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속에 있을 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많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니 힘들었던 그 시간 또한 나의 소명임을 느끼게 되었다. 교직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소명의식이 없으면 버티기 힘든 직업인 걸 알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그것이 희미해져가는 것을 느낄 때 가 있다.

교직에 10년 이상 근무했을 때 교원이 무급으로 휴직을 신청할 수 있는 자율연수휴직제도가 있다. 20201123일 자로 경력 10년 이상에서 5년 이상으로 개정되어 입법예고 상태라고 한다. 어떤 이유로든 휴식이 필요한 선생님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 같아서 공감이 되었다. 나에게 사랑과 감동을 주는 것은 아이들이지만 상처를 주는 것도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온전히 다시 사랑하려면 어느 정도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 또한 한 때는 생각하기 싫을 정도였던 학교가 이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드는 것 같으니 말이다. 가끔씩 오는 제자들의 연락, 함께 찍은 사진들, 아이들이 써줬던 편지를 읽어보며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얼마 전 교직에 있지 않은 친구가 나에게 선생님 하는 것이 좋냐고 물어봤을 때 난 아이들을 보면 일단 좋다고 대답하고 작년 마음가짐과 달라졌음에 스스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들께 애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란다. 하지만 선생님 본인도 어떤 형태로든 충분히 휴식시간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위해서, 또 아이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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