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호/얼렁뚱땅 문화 살롱] 악취미들
“삶의 파국으로 간주되는 상실 경험은 글쓰기의 욕망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위 문장은 내 고달픈 첫 번째 창작물의 산파(産婆)이자, 대학생활 동안 마주친 수십 명의 맹랑한 교수들 중 가장 불안한 눈빛을 가진 어느 남자가 내 소설에 관해 쓴 비평의 일부이다. 내가 간신히 부여잡은 문자를 나열하는 버릇이 어쩌면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낡아빠진 게으름과 언젠가는 버려야 할 질투심이……, 마침내 상실의 고통으로 변모하여 나로 하여금 무엇이라도 쓰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이 모든 어설픈 고민이 허무한 착각일지라도 내 욕망에 나는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아아, 이건 위험한 발설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엿듣지나 않았을까.’
「악취미들」, 김도언
엿보고, 엿듣는 것만큼 색다른 희열을 안겨주는 행위가 또 있을까. 접두사 ‘엿-’이 붙음으로 인해 내가 보고 듣는 것은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영역에 존재한다. 사람들이 놓쳐버린 괴상한 장면과 감춰져야 마땅할 소리들에 부딪히는 경험은 사뭇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우린 때론 사람들이 애지중지 아끼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쉽게 분실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깊숙이 개입된 못된 버릇과 수치스러운 기억들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버려둔 채 떠나는 것들에 이따금 투영되곤 한다.
신문에 기고한 글이 벌써 두 자리 수에 이르렀다. 그간 썼던 글을 죽 훑어본 뒤 파악한 일련의 공통점은, 나란 인간을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것이었다. 글은 쓰는 사람의 여러 단면들, 이를테면 기억과 감정의 파편들이 한데 모인 지저분한 양동이와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주섬주섬 허물어서 다시 조립한 뒤, 누가 읽어줄지 모르는 지면에 내놓았다. 이는 만만치 않은 리스크를 수반하는 과업이지만 동시에 묘한 쾌감을 안겨준다. 글을 쓰고 읽는 것은 엿보고 엿듣는 열망과 쉽게 포개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멋들어지게 묶은 쓰레기봉투를 시시때때로 훔쳐보곤 하는, 께름칙한 취미를 가진 셈이다.
‘어떤 경우 세상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허술하다.’
「악취미들」, 김도언
김도언은 놀라운 수준의 창작욕을 가진 괴물 같은 작가라 할 만하다. 그는 소설, 수필 등의 산문 작업에 능할 뿐 아니라, 시인으로도 등단한 바 있다. 그는 대놓고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든다.”라고 외칠 줄 알며, 글을 통해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해소하고, 한편으론 그러한 해소 방식을 두려워한다.
소설 「악취미들」은 작가 김도언이 바라본 온갖 난잡하고 뜨거운 욕망의 모음집이다. 인간 욕망은 그것이 어떤 질감과 크기를 갖는지와 무관하게 제대로 해소되기 어렵다. 출생으로부터 저절로 세계에 편입된 인간은 기존에 이미 정립된 관습과 조작된 격률에 묶이기 일쑤다. 자신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은 필연 왜곡된 상태로 몸집을 불리게 된다. 달리 말해, 인간이 가진 취미란, 강력하고 단단한 사회의 틀에 의해 제어되거나 ‘악취미’라는 누명을 쓴 채로 박제된다.
그럼에도 인간의 열망은, 오만과 아집으로 끈끈히 엉긴 체계 속에서도 거침없이 무럭무럭 자란다. 취미를 악취미로 치부해버리는 세계는 사실 그 억지스러움만큼이나 터무니없이 허술하여, 개개인의 욕구는 단단한 세계의 감춰진 틈새로 시나브로 새어나온다. 이러한 행태는 「악취미들」의 주된 골자이며, 총 열 개의 단편에서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죽은 동생의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의 텁텁한 권태와 혼란. 고양이와 간음하길 즐기는 지붕 위의 소녀. 뒷자리서 아내의 간통을 방관하며 그를 통해 수입을 얻는 택시 운전수. 군대에서 당한 성폭행을 잊지 못하고 망상적인 복수 계획을 꿈꾸는 청년. 톱스타가 된 아들을 교살한 베테랑 노년 배우. 작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차단당해 튕겨져 나왔다. 그러나 이전에도 말했듯, 치밀하지 못한 세계가 내리는 형벌은 끝내 자체의 영토에서 인간을 완전히 추방시키진 못한다. 숨죽인 악취미들은 망령이 되어 우리 주위를 떠돈다.
‘삶이 고단한 자들은 아량이 부족하다.’
「악취미들」, 김도언
때때로 난 다른 이들 틈에서 잘 섞이지 못한다고 느낀다. 좀처럼 소화되지 않는 단단하고 부패한 음식물이랄까. 이것이 나를 포함한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갖는 감상인지는 알 수 없다. 통째로 묶인 군상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난 시꺼먼 침울함 밑으로 무참히 뭉개진다. 사람들은 모여 있으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소홀해지고, 옆의 친구를 갖은 수단을 동원해 마모시키면서 하릴없이 어리석음을 키운다. 이상적인 화합이란 것에 커다란 불신이 생겼고, 일제히 단결하여 미친 도시가 아이들의 잠재성을 말살해버리는 광경을 지나치게 자주 보았다.
“늘 너무 많은 고민을 한다,” 혹은 “뭔가 불만에 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둥의 핀잔을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현실에 온전히 만족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또한 한 인간의 생애에서 욕구의 절대적인 충족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개인이 품은 욕망의 모양새는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하여도 가늠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불평과 불만, 외로움과 열등감을 자기 삶에서 제거해버리고자 애쓰는 이들은, 애석하게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악취미들」은 지저분한 양동이와 같다. 이 대야에 가득 담긴 불쾌하고 떫은 잔해들은 자기기만에 익숙해져버린 많은 이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열망의 잔상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음침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자신의 숨기고 싶은 모습을 엿보게 될 것이다. 거울을 살펴보다 거울의 더러움에 놀라 표면을 싹싹 문질러 닦은 뒤, 곧 깨끗한 유리에 비친 추악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