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호] 나가사키, 짬뽕이 아닌 난학으로 기억되고 싶다
짬뽕으로 유명한 그 곳. 나가사키에는 부채꼴 모양의 조그마한 섬이 있었다. 데지마(出島)라고 불리는 이 인공섬은 폭이 70미터, 안쪽지름이 190미터, 바깥쪽이 233미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지금은 주변이 매립되어 육지가 돼버렸지만 한 때 대외교역의 유일한 창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성립한 에도 막부는 봉건적 질서를 위협하는 예수회의 포교를 거부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선교사들은 모두 쫓겨났고 교역도 철저히 거부됐다. 유일하게 접촉을 허가받은 유럽인은 네덜란드 상인들이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구교가 아니라 신교임을 들어 자신들이 예수회와 관련이 없고, 포교가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막부는 상인들의 자본출자를 받아 데지마를 만들어 이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다른 유럽인과의 교류를 금지한다는 전제로 네덜란드인의 교역을 허가했다. 물론 데지마 내에서만 활동이 가능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의 수도로 자카르타라고 불리는 바타비아는 당시 향료무역의 집산지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약칭 VOC)의 동남아시아 식민본부가 있던 곳이다. 여기서 출발한 네덜란드의 무역선은 몬순을 타고 7~8월 데지마에 입항해서 일본 상품을 싣고 12월 즈음 데지마를 떠났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예수회활동으로 인한 서양문화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세계 은 생산량의 1/3을 차지하는 이와미 은광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을 토대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주인선(주인-붉은 인장이 찍힌 무역허가장을 가진 배) 무역을 실시하던 막부의 정책과 맞아 떨어져 가능했다.
화란(和蘭)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그들에게서부터 유입된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을 일본인들은 난학(蘭學)이라 불렀다. 난학은 17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일본에서 유행했다. 난학 자체는 에도에서 발전했지만 시작점인 나가사키에 유학을 갔다오거나 그곳에서 온 사람들이 전파했다. 데지마에서 퍼져나간 네덜란드 문화는 에도의 의사였던 스키타 겐파쿠(杉田玄白)가 그의 동지들과 함께 네덜란드 의학 서적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해 <해체신서>로 내놓으면서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겐파쿠를 비롯한 일본 의사들은 네덜란드어를 몰랐기에 글을 읽을 수는 없었고 해부도를 보는데 열심이었다. 매우 사실적인 묘사로 이뤄진 <타펠 아나토미아>의 해부도는 기존의 음양이론과 한의학에 의존하던 일본 의사들에게 이질적이고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겐파쿠와 동료들은 실제 해부에 참관하면서 해부도가 사실임을 검증해냈고 서양 학문에 대한 감탄과 일본 의학 전반에 개혁이 필요함을 느끼게 됐다. 그들은 그림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탐구를 원했고 단순히 알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번역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학서를 읽어 낼 줄 아는 통역이 없었기에 그들은 한자 한자 네덜란드어를 배워가며 1년 10개월에 걸쳐 번역을 해냈다. 이는 단순히 의학발달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해체신서>의 등장으로 네덜란드 의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박물학, 수학, 천문학 등 네덜란드 학문 전반에 대한 탐구가 일본에서 이뤄지게 된다. 해체신서로 부터 시작된 번역 운동은 중국에서만 만들어져왔던 한자어를 일본 스스로 ‘발명’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서 동아시아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학문의 중화적 질서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해체신서로 난학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자 막부도 난학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피력하면서 공식적인 번역기관을 두고 난학의 연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일본의 근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난학의 선구자이자 시초인 스기타 겐파쿠는 자신의 저서인 난학사시에서 난학의 보급과 유입이 네덜란드 의술을 배우려는 데서 시작됐음을 회고하며 난학이 유행하게 된 역사를 기록한다. 늘그막에 난학이 크게 유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의학이 발달하게 됐음을 기뻐하며 83세의 겐파쿠는 글을 쓴다. 그가 쓴 난학사시는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메이지 시대에 소개됐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표적인 메이지 사상가로서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문화와 정신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문명개화와 탈아입구를 주장한 인물이다. 제국주의의 길을 걷긴 했지만, 시대적 위기에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던 메이지 사상가들은 난학을 기반으로 이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은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여 체화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근대국가를 수립해 나가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데지마는 작았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난학은 결코 일본에게 작지 않은 것이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네덜란드 상관을 기웃거리며 알파벳 교육책자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데지마에, 나가사키에 한번 발을 붙여보고 싶다. 짬뽕은 덤으로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