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호/시론] ‘할 수 있다’와 소통의 리더십
리우올림픽 이후 갑자기 ‘하자’ 열풍이 불었다. 좌절이 아니라 ‘한강의 기적’을 이뤘듯이 우리는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불어넣는 듯하다. ‘하자!’ ‘할 수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세상의 변화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완벽한’ 사회가 아니라면 나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기획하고 부딪쳐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내가 외치면 너희들은 따르라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를 ‘같이’ 따져봐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달려들 아젠다가 필요하다. 총장이 바뀔 때마다 ‘아젠다’의 수자도 늘어갔고, 문서도 늘었다. ‘어렵사리’ 만든 어떤 계획서는 그대로 이면지로 바뀐 경우도 있다. 그래도 좋다. 뭔가를 한다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다 낳은 사회, 그리고 보다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지금 계획하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 학교의 아젠다는 무엇인가?
아젠다가 정해진다면 다음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옛날에는 말이야 삽 한 자루만 있으면 모든 걸 할 수 있었어.” 청년들이, 학생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삽 한 자루 던져주고 신념으로 극복하던 시대는 지났다. 가능한 방법과 절차를 제시해야 ‘할 수 있다’는 것에 매달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혹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도록 가시적인 방법을 ‘같이’ 만들어가야 한다. 무모한 과제는 그를 달성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기적’을 만든 것이고 긍정의 힘을 배가 시키지만, 실패가 반복되면 ‘할 수 있어’는 ‘나는 안 돼’라는 ‘루저’를 만들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무턱대고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의 목적과 방법은 구성원과 소통하고 협조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원자화되고 경험 집단의 다양화되면서 의견이 아주 다양해졌다. 그리고 매체의 발달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 모두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며 자유는 늘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양성이 있는 만큼 이해관계가 걸린 경우 의견을 조율하기도 어려워졌다. 여러 의견 가운데 어느 것이 공익이고 어느 것이 개인적 이익이지? 내 이익이 눈앞에서 사라지는데 나는 바보같이 “네” “네”를 외치고 있어야 하나? 머리가 혼란스럽다. 나도 내 이익을 지켜야겠다. 논쟁이 커졌다.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이익이 일치하는 집단끼리 모여 이너 서클을 만들어 그들만의 말만 한다. 소통이 안 된다. 심지어 만나기도 싫다. 결국 치열한 투쟁적인 삶을 선택하거나 냉소적이고 방관자적인 삶으로 돌아선다. 싸움이 싫어서 회피하고 방관하고 “참 사람 좋아” “양반이야”라는 말을 들으며 물러나는 사람은 일부 사람이 보기에 그저 ‘루저’일 뿐이다. 위기다. 이 생존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 나만 아니면 되고, 나만 살면 된다. 사회는 안녕하지 못하다. 교원대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임 이론이 있다. 서로의 선의를 믿고 조금씩 손해보고 협력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선택하면 모두에게 가장 나쁜 결과를 맞게 되는 모형을 말한다. 시장사회에서 이해를 다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싸움에도 공정한 규칙이 있어야 하며, 자기 파괴적 싸움은 피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잘못된 행동과 관행을 눈감고 합리화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이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불신하고 협력을 하지 않아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서로를 신뢰하며, 공정한 규칙을 만들기 위해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학내 문제로, 혹은 어떤 아젠다로 시끄러워도 좋다. 논쟁이 많아도 좋다. 학교가 무언가를 하며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이해기반이 세분화되어 논쟁이 심할수록 경청과 소통의 장도 필요하다. 혹자는 이해관계가 이렇게 복잡한데 서로 양보하여 공론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소통의 리더십이며 타협의 정치이고 구성원의 선택이다. 사회는 ‘루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손해를 보더라도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 ‘같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지니고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