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호/세상의창] ‘잠정적 유토피아’를 현실로 이끄는 노동운동
‘현재를 중심으로’ 미래를 위해 고민하는 자세
발행: 2014. 02. 24.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홍기빈) (문장 인용 출처)
미래는 현재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금의 여기에서 다음 지점으로 내 존재 전체를 움직일 수 있도록 이끌고 꾀는 그곳이 바로 미래다.
2013년 11월 10일, 전태일재단은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투쟁 위원회(정투위) 최일배 위원장과 유성기업 노조 홍종인 지회장에게 ‘전태일노동상’을 안겼습니다. 억울하고 무자비한 정리해고에 맞서 천막과 철탑농성으로 대항하는 이들의 현실은 40여년 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들고 불에 사그러든 날의 현실과 별다르지 않습니다.
1960년대 당시 정부의 산업화 정책으로 인해 벌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들은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활동이었습니다. 공장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였고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밀집되어 폐질환에 시달렸으며, 극심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전태일은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을 묵인할 수 없었고 결국엔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투쟁의 행태를 보입니다. 43년이 지난 지금 역시 정부와 기업의 압박은 여전합니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도덕적인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시를 내리면서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내립니다. 코오롱재단은 2005년 객관적 기준도 없이 ‘그냥’ 노동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으며, 유성기업은 부당한 노조 파괴 공작을 밝히려 든 홍종인 지회장을 해고하였습니다. 당시 노조 파괴 전략을 짠 창조컨설팅은 청와대나 국정원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43년여 전 전태일은 우리에게 자본이 아닌 인간이 우선이 되는 정신을 일깨워 주었으며, ‘현재’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유토피아’(근로기준법을 지키는 세상)를 위해 무엇을 실천하여 행동에 옮길 수 있는지 몸소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극복하기 위해선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냥 막연하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는 단지 미래에 대한 청사진일 뿐, 그것이 실제로 실현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막연한 유토피아는 ‘이랬으면 좋겠는데……’와 같은 수동적인 생각만을 양산하게 되며 이러한 생각으로는 절대 부정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스웨덴의 정책 발전을 이끈 정치가 비그포르스는 새로운 개념의 유토피아를 제시했는데요. 그것은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실천해 나가는 ‘잠정적 유토피아’였습니다. 이 때 부정한 세상을 직접적으로 접하는 노동자나 근로 대중들의 현실은 출발점이 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이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이끌어낸 후, 이 이상에 대한 모든 사회 성원들이 동의를 얻어내고, 이상이 이루어진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최종 결론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실현 불가능한 먼 미래상은 아니며 확실히 현 상황에서 실현해낼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지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상황에서 이끌어낸 이상에 대해 사회 성원들의 동의를 얻어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이 방법을 회프딩의 ‘복지의 원칙’의 일부분에서 찾아보기로 합시다. 인간의 삶은 대부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감정 또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나’의 감정도 타인을 지향하게 되고 결국 내가 포함된 ‘우리’의 감정으로 이어져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공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상태를 신속히 파악하고 이에 대해 공감을 일구어내어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감정’까지 이어진다면 잠정적 유토피아의 ‘윤리적 이상’은 폭발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태일, 그리고 오늘날의 전태일을 닮은 많은 사람들은 현 사회에서 구토를 느꼈고 이에 순응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더 나은 미래인 잠정적 유토피아를 위해 현재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먼 미래의 막연한 이상세계를 동경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수 있는 확실한 목표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했고 일반 대중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관심을 공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이상이 다인 건 아닙니다. 윤리적 당위와 반드시 구분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과학적 진리’입니다. 윤리적 이상점으로 정해진 미래는 냉철한과학적·경험적 성찰에 의해 철저하게 비판되고 또 계속 현실에 맞게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개선점을 끊임없이 연구해가는 과정을 통해 ‘잠정적’ 유토피아가 실제 ‘현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비그포르스는 무엇보다도 유토피아를 만드는 진정한 뿌리는 ‘현존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임을 밝힙니다. 현실의 여러 모순들에 대한 좌절과 문제들이 해결된 세상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구성된 미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열정적인 행동을 이끕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모순과 부조리를 감지하고 그것에 ‘구토’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각자의 머리 속에 어떠한 이념과 가치를 담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질 수 있고, 따라서 이념과 가치가 현실을 바꾸는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형태를 넘어 구체적이고 명쾌한 형태를 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노동운동은 잠정적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는 노동자와 근로 대중으로부터 출발하며, 운동자들은 이를 일반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활동하면서 제도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자기 자신을 내던지면서까지 노동운동에 힘써온 사람들을 우리가 존경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계층의 이익만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투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분노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이 투쟁하는 부조리한 사회 구조는 역시 우리의 사회에게도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들이 우리 몫까지 싸워준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죠.
현재 우리들 각각은 잠정적 유토피아를 정하고, 이를 실현시키는 데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불의한 일에 분노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공감을 촉구하며 사회 제도의 개선을 외치는 사회 기층민들의 사연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것으로도 우리는 잠정적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요. 사회 내에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는 여러 사람들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것으로 내 마음을 전해줄 수 있고,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참여해볼 수도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가는 관계에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서 어떠한 열망을 품고 ‘가상의 미래’를 만들어가는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실제 미래는 만들어질 것입니다. 비그포르스가 제시한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아이디어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실제로 스웨덴에서 이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 우리의 능력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