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호] 실존주의의 심리학: 심리학 편
● 자기기만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제시한 ‘자기기만’이라는 개념은 ‘무의식’을 도입했던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정면에서 논박한다. 이드, 자아, 초자아라는 영역을 가정하여 인간의 심리를 탐구하는 프로이트는 사르트르의 재치있는 논리에 의해 파괴되는데 그 논변이 꽤 재미있다. ‘자기기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살펴보자. 자기기만은 일단은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기만-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속이는 것-거짓말의 속성을 보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거짓말은 그 특성상 ‘속이는 자’와 ‘속임을 당하는 자’를 필연적으로 상정한다. 거짓말이 나와 타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거라면 속이는 자와 속임을 당하는 자의 역할놀이는 어떠한 형태로든 유지된다. 그러나 자기기만-즉 자기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자기자신을 속인다니, 나는 ‘나’일 뿐인데 자신을 속이려하기도하고 또 그런 자신에 의해 속임을 당하기도하다니.
사르트르는 프로이트의 ‘이드, 자아, 초자아’, ‘무의식, 전의식, 의식’ 등의 구분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예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자기기만은 근본에서부터 무너질 운명에 처해있다(『존재와 무』에서는 자기기만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예시로 제시하는 연애하는 여성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는 자체만으로도 매우 탁월한 논증이니 한 번쯤 읽어보길 바란다). 우리는 자기기만인 채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기만의 구조상 ‘자기’는 이미 ‘모순’에 처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를 여러 영역으로 세분화한 프로이트와는 달리 사르트르는 ‘의식의 일원성’을 주장한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의식화’라는 모토아래 억압되고 소외된 무의식을 의식이라는 수면위에 떠오르게 하여 치료하는 게 목적이다. 사르트르는 신경증 환자가 사실 자신의 문제점인지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으며, 환자가 자신의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상담가에게 ‘저항하는 현상’은 (다른 부분도 아닌 하필 자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신경증도 자기기만의 적확한 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만약 문제가 되는 부분이 단지 무의식에 속해있다면 애초에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신경증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하필 그 부분에 대해서만 저항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많은 반론과 논의가 뒤따라 올 수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도 기존의 심리학에 대해 상당히 새로운 관점을 던져주는 시도는 충분히 의미있다.
알 수 없다고 여겨지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의 도입은 애초에 그 도입 자체가 인간의 심리 상태를 ‘환원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불가지(不可知)가 가지(可知)를 가능하게하는 기묘한 상황에 이르게 한다. 반대로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영역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오로지 의식으로 충만한 인간을 상정하며 ‘의식의 일원성’을 주장한다. 가지(可知)가 인간을 불가지(不可知)한 존재로 만든다. 의식의 일원성을 통해 사르트르는 인간을 ‘환원불가능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인간은 무의식의 영역이든 의식의 영역이든 어느 특정한 영역으로 단순히 귀속되는 게 아니다. 오로지 의식의 역동적인 운동 속에 인간을 특정한 좌표에 속박시키지 않고 ‘환원불가능한 존재’가 인간이다. 환원불가능한 것-인간은 앞서의 호(號)에서 언급했던 ‘자유’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된다.
사르트르가 ‘실존적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기존의 심리학을 논박하는 부분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지면의 제한상 이 부분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제3의 심리학이라고 불리는 빅터 프랑클의 ‘로고테라피 요법’으로 급하게 건너 뛰어가본다.
● 빅터 프랑클
프랑클의 사상은 그의 삶의 궤적과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심리학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정신과 의사였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에 몇 년을 수감되면서 목숨을 담보당한 상황을 수차례 맞닥뜨리게 된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그는 종전 후 실존주의를 포함한 철학을 깊게 공부하여 학위를 딴 후 ‘로고테라피’라는 심리학의 분파를 만든다.
로고테라피(Logotherapy)는 의미를 뜻하는 logos와 치료를 뜻하는 therapy의 합성 용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더 이상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없어졌는데도 정신질환자가 끊이지 않는 현상을 관찰하고 환자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프랑클은 이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에 정신질환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신경증 자체는 기존의 정신분석에 의해서도 치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증이 사라진 뒤에도 인생의 공허함은 환자들에게 계속 남아 있었고 실제로 신경증 치료 후에도 삶의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기존의 심리학이라면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치면 끝이었을 텐데 과연 무엇이 ‘자살’로 이르게 했을까? 프랑클은 이들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자신에게 할당되어야 할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아주 다양한 인간도 똑같이 배고픈 환경에 처하게 된다면, 개인적 차별성은 흐려지고 똑같이 요란한 충동의 표현을 나타낼 것이다.”라고 했다. 아마 극한의 상황에서는 무의식의 발현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프랑클이 극한의 상황인 수용소에서 실제로 체험한 내용은 프로이트의 언급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상황에 굴복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급박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배려해주고, 심지어 다른 이의 목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배고픔은 서로 같았으나, 사람들은 서로 달랐다. 실제로 몸을 지탱하는 열량(음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랑클도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무의식의 요소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한다. “모든 선택들에는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들은 선택자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라는 그의 말 역시 같은 맥락 위에 서있다. 어떤 인간의 선택을 그의 무의식에 잠재한 요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어떤 한 원인에 의해 계속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게 되고 마는 수동적인 생물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클은 무의식의 요소를 제거하고 그 속에 인간의 ‘자유’를 가져다 놓는다. 나는 내 선택을,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나는 현재의 좌표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사정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좌표를 옮길 수 있다. 정신분석을 범결정론주의와 범성욕주의라고 단정짓고 새로운 심리학을 구축하려는 프랑클의 노력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프랑클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필연적으로 ‘인간조건’에 속박되어있다. 필멸성, 성(性), 국적 등이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조건에 대해 자유롭게 태도를 취할 수는 있다. 그가 예시로 든, 같은 가정환경에 자란 교활한 형제가 한 명은 범죄자가. 한 명은 범죄심리학자가 된 흥미로운 사례는 이에 대한 적절한 예다. 프랑클은 범결정론주의에 맞서 무의식 속에 사장되었던 ‘의식’을 다시 꺼내들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의식 속에 함돌된 것만이 아니다. 강조점은 이제 과거에서부터 과거와 미래 ‘사이’로 옮겨지게 된다. 인간은 무의식의 요소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다. 그것은 ‘자유’다. ‘인간은 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은 조건들에 대해 자유롭게 맞선다.’ 인간은 비로소 세계를 정복하고 마침내 자기 자신마저 낱낱이 분해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자처하려한 전지전능의 ‘신’이기를 그친다.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인간으로 남기를 결심한다.
● 감사의 말
계획했던 것들이 많이 바뀌고 그럼에도 무언가 어정쩡하게 끝을 마무리 짓게 된 것 같아 모처럼 좋은 기회를 준 <교원대 신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하며 논의되지 못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남은 기간 동안 어떻게 다룰지 곰곰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번 연재는 그 과정 속에서 글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 얽힌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들로 인해 저를 되돌아보고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연재물을 끈기 있게 지켜봐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독자분들뿐만이 아니라 저 자신도 글이나 말뿐만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을 ‘실존적’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를 바라며.
“시작은 그것이 사람들 속에 기억되는 한 모든 것을 구원하는 신과 같다” (플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