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호/세상의창] ‘평화 없는’ 평화협정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끝나지 않는 이유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무리드 바르구티 저)
「점령지는 이제 저항 시인들이 노래한 ‘그리운 땅’이 아니다. 정당들의 구호에 등장하는 항목도 아니고, 논쟁이나 은유도 아니다. 그것은 전갈이나 새나 우물처럼 손에 닿는 것, 분필 자국이나 발자국처럼 눈에 보이는 존재로서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팔레스타인인이 휘두른 칼로 이스라엘인이 사망함에 따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남성을 사살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유혈 갈등 소식을 듣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지난 7월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사건만 해도 팔레스타인을 말 그대로 ‘하늘만 뚫려 있는 지상 최대의 감옥’ 으로 만들었습니다. 일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희생자가 발생했죠.
현재 팔레스타인의 자치구는 이스라엘 영토를 사이에 둔 채 서쪽의 가자지구와 동쪽의 요르단 서안 지구로 분리돼 있는데요, 이스라엘은 종종 중간에서 이를 봉쇄해 두 지역 간에 전혀 오갈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각 지구에 800km를 상회하는 높다란 분리 장벽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자치구로 반입되는 물품을 일일이 검수합니다. 창살만 없지 감옥과 다를 바 없죠.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선 “‘감옥’에서 서서히 힘을 잃어 가느니 차라리 전쟁을 하는 것이 낫다”는 여론이 우세라고 합니다.
여기, 30년만에 고향 땅을 밟은 한 시인이 있습니다.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태어난 무리드 바르구티는 이집트 유학생 신분이었던 1967년에 타지에서 제3차 중동전쟁 소식을 듣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점령 당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의해 국경이 봉쇄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980년 이집트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게 되면서 이집트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들이 추방당합니다. 바르구티 역시 추방 대상이 됐죠. 그는 고향인 라말라로도, 처자식이 있는 이집트로도 돌아가지 못한 채 해외 곳곳을 전전하며 난민 생활을 이어갑니다.
바르구티는 오슬로 평화협정에 체결되고 난 뒤인 1996년에 비로소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라말라를 향한 칙칙한 나무 다리를 건넙니다. 30년 전, 부푼 마음으로 라말라를 떠났던 소년 바르구티는 자기 자신이 30년 동안 라말라에 머물 권리를 잃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라말라에 이른 소년 바르구티의 머리칼은 검은 빛을 잃었습니다. 이 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바르구티로 하여금 인고의 세월을 떠돌게 했을까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골은 그 역사가 깊은데요. 발단은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입니다. 당시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인 아랍계 주민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선조의 땅으로의 ‘귀환’을 이유로 들어 이주해 오는 유대인들이 점차 늘어났고 그에 따라 유대계 거주민들은 독립 국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를 유대인의 시오니즘 운동이라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말미에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은 유대인 정치 집단에게 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는 약속, 즉 ‘밸푸어 선언’을 전달하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유대인 이주자 집단과 아랍계 주민들 사이의 유혈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아랍계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1차대전 때와는 대조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제한합니다. 영국은 지금껏 팔레스타인을 정치적 용도로 이용해왔던 것이지 지역 거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선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계 거주민들은 이미 독립국가를 세울 준비에 착수했고,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을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찬 ‘건국’의 해였을지 몰라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겐 ‘대재앙’의 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UN이 정한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까지 공격해 점령한 뒤 주민들을 내쫓았고, 이후 지역 등지에 내쫓긴 주민들로 구성된 거대한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형성됐습니다. PLO(팔레스타인 자치 기구)가 창설된 지 3년이 지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합니다. 바르구티가 30년 동안 라말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전쟁이죠. 이 전쟁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땅은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지구 두 지역으로 분리됐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있던 이들은 귀환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원조를 노린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게 된 이후 이집트에 체류하던 팔레스타인인마저 내쫓깁니다.
1987년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 내 난민촌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죠. 바로 이스라엘에 반해 벌이는 민중 봉기인 ‘인티파다’가 일어났습니다. 이후 1988년 PLO의 수장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고, 뒤이어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이에 라말라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됐고 독립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말뿐이었는지, 2001년 이스라엘 총리가 된 아리엘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정착촌을 공세적으로 세우는 등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을 자극함으로써 집권 선거에서 승리를 차지합니다. 아리엘이 촉발한 갈등은 1987년에 이어 제2차 인티파다를 불렀고 수년에 걸친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 4천 명 이상을 살해합니다.
무참한 살상 이후, 이스라엘군은 2005년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는 제스처를 보였으나 아직까지도 돌연 공습하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2008년, 2012년 그리고 바로 올해까지도 이어집니다. 이렇듯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단지 역사로 남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30년만에 라말라로 돌아온 바르구티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점령 그 자체보다도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협정이 결코 ‘평화’ 협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슬로 협정을 맺은 이후에도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가자지구 침공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최근 사태를 미뤄 보아 제3차 인티파다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불과 4달 전인 올해 7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또 다시 침공해 팔레스타인에 엄청난 희생을 안겼습니다. 경악스러운 건, 몇몇 이스라엘인들이 가자지구 공습 현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살상을 관람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SNS에서 논란이 됐던 사진의 한 여성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기까지 합니다. 무참한 인간 살상의 현장에서 저토록 환호하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애초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맺은 평화 협정은 그저 어물쩡 상황을 넘어가 비난부터 면하고 보자는 생각에 맺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이유는 폭력으로 우리와 다른 저들의 사상을 바꾸고 내 입장만을 내세우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갖가지 전쟁과 두 차례의 인티파다, 공습에 따른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 개선이 제자리를 맴돌고 심지어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 이유는 그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고집을 최우선으로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똘레랑스 정신이 절실한 때입니다.
발행: 2014.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