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호/기획] 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2020 우리모두 전태일 문화제
꺼지지 않는 불꽃,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입구, 한 청년이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몸에 붙은 화염 속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청년은 잠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외쳤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의 몸을 심지로 노동 운동의 불꽃이 타올랐다.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 당시 22살이었다.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노동 운동이 뜨겁게 불탔고 그의 죽음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열악했던 노동 환경과 임금, 형식적인 근로기준법, 부실한 감독 체계 등 전태일이 바꾸고자 했던 많은 부분이 화염에 휩쓸려 재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타지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부정의에 고통받고, 아직도 태워야 할 부분은 남아 있다.
2020년 올해는 전태일 50주기이다. 이번 447호 기획에선 이를 기념하여 전태일 분신의 배경과 영향을 알아보고 현 노동환경에 대해 고찰한다. 또한 서울시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50주기 범국민 행사위원회가 개최한 ‘2020 우리 모두 전태일 문화제’를 소개한다. 어느덧 잊힌 불씨가, 잊혔으나 필요한 불씨가 다시 살아나길 바란다.
◇ 뼈를 누르는 노동 현실, 그의 몸에 불을 붙이다
“100억 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거리는 들떠 있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외로워야만 합니까. 다들 잘 살게 되었다는데, 모두들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하는데 저희들은 왜 이렇게 배가 고픕니까... 알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은 누구를 위해 일해 왔으며 또 일해야 합니까?”
위 글은 1978년 원풍모방 노동자 장남수의 한탄이다. 60~70년대 노동 환경은 이로써 집약된다. 경제 성장 정책의 성공으로 국가 경제는 분명 발전했다. 하지만 그 원동력이 되었던 노동자들은 경제 성장의 단물을 맛볼 수 없었다. 돌아온 것은 변함없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임금 체불이었다.
산업화 시기의 노동자들은 고노동 저임금에 시달렸다. 전태일열사 30주기 추모사업위원회의 심포지엄 자료에 따르면 1970년 전산업 노동자의 평균임금금액은 한 달에 17,831원이었다. 또한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의 월급을 조사했는데 이에 따르면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재단사가 한 달에 30,000원, 현재 가치로 620,310원을 받았다. 1970년 정부가 말한 도시 근로자의 최저 생계비는 2인 기준, 한 달 17,978원이었다.
노동자들은 이런 박봉에 시달리면서 장시간 근무해야 했다. 1970년 당시 노동시간은 전산업 평균 1주당 51.6시간이었고 제조업의 경우는 53.4시간이었다.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4~15시간 일했고, 일이 많은 날에는 추가로 근무해야 했다고 한다. 어떤 때는 회사 측에서 잠을 쫓는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놓아가며 밤일을 시키기도 했다
장시간 노동하고 적은 임금을 받지만 이조차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하 ‘한국 노총’)의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69년과 70년도에는 10억원 가량의 임금 체불이 있었다.
당시 노동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의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이 기준이었고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근로감독관들의 사업장 방문은 거의 없었으며 노동자들이 문제를 제기해야 검사가 이루어졌다. 그나마도 노동자들은 보복을 우려하여 문제 제기를 꺼렸고, 검사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열사의 몸에 기름을 붓는다.
◇ 타버린 재 위에 불씨가 돋다
그동안의 항쟁은 정치적 의미의 민주화에 편중되었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대학생 등의 지식인 계층은 적었고, 노동 현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비교적 부족했다. 그러나 열사의 분신은 노동자 처우 개선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 상과 대학 학생들의 단식농성을 시작으로 이화여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 여러 대학에서 추도식을 열고, 일부는 노동자들을 교육하거나 직접 위장취업하는 식으로 노동 운동을 했다.
또한 고용주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눈앞의 생계에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은 분신에 자극을 받아 투쟁에 나섰다. 우선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동일방직, 반도상사 YH무역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일부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1971년 1월 20일에 일어난 아시아자동차노조 부회장 지원영은 노조결성 방해에 대한 항의로 자결을 선언했다. 1974년 2월 22일에는 대구 대공신철 공업사 노동자 정세달은 기업주의 횡포를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투쟁은 정치권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1971년 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노동 문제 해결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1971년 1월 17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동문제를 언급한다. 이후 여러 투쟁과 법 개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열사의 분신은 그의 육신과 함께 재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이 다시 불씨가 되어 노동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투쟁의 촉매가 되었다.
◇ 전태일을 마주할 수 없는, 여전히 참혹한 노동현실
힘겨운 노력의 결과로 몇몇 부분에서 개선의 빛이 다가오기도 했다. 현행근로기준법에 따르면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일 8시간(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경우 7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주 단위로는, 1주간 휴게시간을 제하고 40시간(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경우 35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또한 노동자의 복지에 관해서는 출산, 유산ㆍ사산 등에 따라 유급 휴가를 보장하게 되었다. 여성 노동자의 경우 5인 이상의 사업장에 근무할 시 월 1일의 생리휴가가 보장된다.
몸 상태가 악화되는 노동자들에게 풀빵을 먹이며 장시간 그들을 혹사시키고, 그런 노동 현장에 가기 위한 교통비마저 없어 먼 길을 걸어다녀야 했던 현실 속 전태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이러한 성과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 벼랑 끝에서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외치고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목숨이 끊어지고 있다. 심각한 노동 문제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우선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처우 및 근무 환경에 관한 문제가 있다.
특수고용노동은 노동자가 스스로 고객을 찾아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의 노동이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택배기사, 대리기사, 보험설계사, 간병사, 학원 강사 등으로 다양한 직종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보통의 노동자들처럼 종속적인 관계에서 수입을 목적으로 사용자에게 노동을 제공한다. 그러나 특정 사업장에 속하지 않고 형식상 1인 자영업자신분으로 계약을 맺는다. 따라서 사실상 노동자이지만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자’라는 근로기준법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아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기 힘들다. 일방적으로 수당이 삭감되는 등 불합리한 처우를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불합리하다 해도 법의 보호를 받기 힘들다. 또한 한시적인 계약의 형태로 고용이 이루어지기에 고용안정성도 현격히 떨어진다. 이들은 불안정한 형태로 고용되고, 불합리한 처우를 받을 위험이 높으며, 법으로 권리를 보장받지도 못하는 것이다.
현장에 걸맞는 법 개정을 통해, 사각지대에 놓인 모든 노동자들의 안정된 노동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이에 대한 경각심과 지속적인 관심이 시급한 상황이다.
임금과 고용형태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은 안전에 있어서도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2010년 9월 7일 새벽 2시경,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끔직한 사고가 일어났다. 환영철강의 직원 김모씨가 작업 도중 발을 헛디뎌 용광로에 빠져 사망한 사고다. 당시 ‘그 쇳물 쓰지 마라’라는 제목의 추모시가 만들어지는 등 전국적인 추모의 물결이 일었고, 노동자의 안전과 산재 사망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러나 2020년 2월, 현대제철 포항공장에서 또 다른 노동자가 뜨거운 용광로 위에 떨어졌다. 사고 한 달 전 노동자들은 사측에 노후화된 쇳물 분배기 뚜껑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교체를 요구했다. 당진 용광로 사고로부터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자들은 죽음이 눈 앞에 있는 노동 현장에 투입되고, 너무 쉽게, 너무 많이 목숨을 잃고 있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로 많은 성과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빛을 보지 못한 이들은 분명 아직도 존재한다. 이미 이뤄놓은 것들에 머물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계속 위험에 떨 것이다. 위험에 떨다 벽에 가로막히면 또 누군가가 기름을 뒤집어쓰고 몸에 불을 붙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될 수도, 우리의 자녀가 될 수도 있다. 경각심을 느끼고, 끈질기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21세기의 또 다른 전태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2020 우리모두 전태일 문화제
전태일의 항거 50주기를 맞아 서울특별시가 10월 14일부터 11월 15일까지를 전태일50주기 추모의 달로 지정하고 ‘2020 우리모두 전태일 문화제(이하 ‘전태일 문화제’)’를 개최한다. 전태일, 그로부터 시작된 연대의 50년을 돌아보고 평등의 100년을 기약하자는 의미다. 전태일 문화제에서는 ▲평화시장 VR 노동미술 작품전 ▲노동미술 아카이브 등 노동미술제 ▲게릴라 버스킹 ▲전태일50주기 추모 문화제(11월 6일 18시) ▲전태일50주기 국제포럼(11월 10일부터 12일까지) 등이 열린다. 한국교원대신문에서는 전태일 문화제가 열리는 전태일 기념관과 평화시장 일대를 방문하여, 그의 뜨거운 자취를 고스란히 따라가 보았다.
◇ 전태일 기념관, 그의 삶을 기록하다
청계천이 흐르는 곳에는 전태일의 발자취가 기록되어 있다. 전태일 기념관은 전태일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한 노동복합시설로, 지난 2019년 4월에 정식 개관했다. 3층에는 전태일의 삶을 그린 상설전시실 ‘이음터’와 기획전시실 ‘꿈터’가 있다. 이음터는 ▲1부 전태일의 어린시절 ▲2부 전태일의 눈 ▲3부 전태일의 실천 ▲4부 전태일의 꿈으로 구성된다. 꿈터는 지난 9월 24일부터 2021년 8월 15일까지 ‘청계, 내 청春, 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전태일의 뜻을 이어 결성된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기획·전시한다.
“나는 기초지식이 없어 영어와 수학 과목은 이해하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과목은 다 재미있고, 50분 수업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 <전태일 평전>, 전태일의 수기 인용문 中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노동자들은 넓이는 8평, 높이는 1.5m도 되지 않는 다락방에 32명이 끼어 앉아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일했다. 전태일이 1970년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재단사 100%가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위장병 등의 환자였고 미싱사 90%는 신경통 환자였다. 심지어 그곳에서 5년 이상 일한 노동자는 모두가 환자였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분신항거한 전태일의 뜻을 이어 1970년 11월 27일에 결성됐다. 그들은 체불임금해결을 시작으로 사업주들이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준수하는지 관리하고 조사하며, 당시의 노동 환경을 개선해나갔다.
◇ 평화시장 앞, 그가 불꽃이 되던 날을 떠올리며
전태일 기념관을 나와 왼쪽으로 청계천을 따라가다 보면 평화시장과 전태일 다리가 나온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저임금으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 그 어린 나이에 뛰놀기는커녕 비좁은 곳에서 일만 해야 했던 어린 소녀들, 그리고 사람이 아닌 물질이 되어 소외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22살의 그가 불꽃이 된 날이다.
11월 13일을 며칠 앞둔 전태일은 평소 같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이야기를 했다. 아들 얼굴 오랫동안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며, 그렇게 되면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을 대신 해달라며. 그렇게 그는 평소와 다른 차림새를 갖추고 집을 떠났다. 다음 날, “아무래도 누가 한 사람 죽어야 될 모양이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석유를 온몸에 부었고, 성냥불에 불이 붙은 몸으로 사람들이 서성이는 길거리로 뛰어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22년간 그를 길러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참혹한 몰골로 그는 끝까지 외쳤다. 비명처럼만 들리던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쓰러졌다. 하지만 전태일의 죽음이 지핀 불꽃은, 그의 정신을 이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노력으로 지금까지도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