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호/사무사] 눈물이 단단해지는 날에는

2020-11-02     편집장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반짝반짝 돋아나는 초록 빛깔에 기뻐하고,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노랑 잎들에 슬퍼하는, 여린 마음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덜컥 겁을 먹었습니다. 친구들의 세계에는 계급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우월한 인상을 지닌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이 그 친구를 사모했고, 그 친구와 친해지지 못하면 약한 존재,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명 한명 소중한 친구인데, 누구는 특별하고, 누구는 존중받지 못하는 것에 아이는 화가 났습니다. 아이는 점차 친구들의 무리에서 멀어졌고, 나중에는 반에서 가장 약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것은 괜찮았습니다.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더 넓은 자연과, 책과, 음악과 친구가 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서럽게 우는 날도 있었습니다. 혼자이기에, 힘이 없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아이는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반 전체를 휘어잡는 친구가 소외된 아이들의 동의 없이 학급비를 사용할 때, 장애가 있는 친구와 짝이 된 자신을 내려다 보며 힘센 친구가 비웃을 때, 아이는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옳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힘센 친구에게 동조하는 거대한 학급과 맞서야 했습니다. 용기를 한 번 내기 위해 수많은 고민이 오가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습니다. 크게 마음 먹고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지만, 쏟아지는 반박과 비난에 다시 맞서야 했습니다. 홀로 선 자신을 외면하는 친구들에게 또 한 번 상처를 받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달이 밝아질 때까지 숨을 꾹꾹 누르며 울곤 했습니다. “모든 친구들을 평등하게 존중해줘.” 아이가 하고 싶은 한 마디였습니다.

옳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이 조그만 아이처럼 너무 큰 힘과 너무 큰 외면에 홀로 맞서야 합니다. 당연한 요구를 하는데, 다급하고 힘들게 외쳐야 하는 나약한 존재가 됩니다. 며칠 전 노란 버스 한 대가 전국을 돌았습니다. 4.16 진실버스입니다. 버스에 탄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의 성역없는 진상규명’을 외치며 시민의 힘을 요청했습니다. 참사 7주기가 다가오는데, 여전히 진실은 수면 아래 있습니다. 더 깊어지고 더 무거워지는 진실에 힘겹게 손을 뻗고, 미끄러지고, 다시 뻗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습기살균제사건,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올해 12월 활동기간이 만료됩니다. 특조위는 몇 걸음조차 내딛지 못했습니다. 참사 전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무 적정성에 대한 자료는 대통령기록물로 ‘봉인’되었고, 특조위 조사에 불응하거나 비협조하는 사례가 많아 진상규명은 더딥니다. 데이터 조작 사실을 발견했지만 추가조사를 위해서는 아직 상당 기간이 필요하고, 진상규명도 더딘데 종합적인 생명안전대책을 수립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합니다. 2015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1기 특별조사위원회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하겠다고 특조위가 밝히자, 청와대는 시시각각 내부 정보를 캐냈고, 특조위 활동을 위한 공무원 임용과 파견을 방해했습니다. 1년 간의 탄압 끝에, 특조위는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하지만 탄압기간에도 공소시효는 흘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304명이 주검이 되어가던 7시간의 대통령 기록물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떨어져나온 파편들만 줍고 있을 뿐입니다. 파편을 따라가는 사이 공소시효는 6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에 관한 청원’과 ‘박근혜 전 대통령 기록물 공개 결의에 관한 청원’을 올린 유가족들은,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돈을 요구한 것도,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아는 것,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 아이들을 생각하며 더이상 마음이 미어지지 않는 것. 그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7년. 놀라우리만큼 긴 시간 동안 거대한 힘이 그들의 당연한 목소리를 온몸으로 막아섰습니다. 처벌해야 할 자들의 잘못은 어둠 속으로 깊이, 더 깊이 숨어 들어갔습니다. 보이지 않는 치밀한 힘은 유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으스러뜨렸습니다. “이제 그만”이라는 시선도 가세해, 다급한 그들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옳은 목소리가 처절하고 무력하게 주저 앉는 게 보편적인 현실이라는 것이, 하염없이 슬프고, 부당합니다.

조그만 아이는 어른이 되어, 커다란 학교의 기자가 됩니다. 보이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듭니다. 굳게 마음을 다잡고 정의로운 보도를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현실의 벽은 점점 두꺼워집니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쏟고, 달립니다. 마지막까지 붙잡다가, 끝내. 놓고 맙니다. 지켜내지 못해서, 무력해서, 결국 외면해버려서. 눈물이 주르르 납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숨죽여 울던 여린 아이 앞에서, 노란 리본 더욱 단단히 여미는 유가족 앞에서, 이미 으스러져 아물지 않는 상처를 품게 된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염없이 부끄러워집니다. 뜨거운 눈물이 납니다.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눈물이 조금 단단해지는 날을 상상해봅니다. 그땐 손을 잡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린 가슴 혼자 아파하지 말고, 우리 같이 힘들고, 같이 상처를 품자고. 끝내 놓아버린 작은 불씨, 내가 그 온기를 다시 간직하고 있겠다고. 당신의 으스러진 몸에도 새살이 돋으면, 그땐 우리 같이. 온기를 뜨겁게 만들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