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호/세상의 창] 사회에 만연한 페스트 환자들
망각으로 인한 기억의 잠식을 우려해야
발행: 2014. 6. 2.
‘페스트’(알베르 까뮈) 인용·참고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 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4월 11일의 대참사가 망각되고 있습니다. 슬픔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합니다. 세월호 사건이 잊혀져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가 단지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것에만 그칠 뿐 사건의 본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차후에 어떤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지를 과연 생각해보고 있냐는 것입니다. 단지 이 사건을 바다에서 벌어진 침몰 사건이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던 가슴아픈 사건이라고 정의내린 뒤 일상 생활로 돌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이 재난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사고로 인한 인간성과 책임윤리의 부재로 사전 예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청해진운항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유착해온 사실이 밝혀진 부패한 정부 부처와 민간업체, 단지 이름표만을 달고 있을 뿐 단 한 명의 실종자도 구해내지 못한 해경과 안전행정부, 청와대 국가안보처 이 모든 각개기관의 부조리가 샅샅이 들춰졌습니다. 이러한 재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채 표면적이고 물리적인 방안만을 사건 해결법으로 제시하는 정부의 행태가 이어질 경우, 표면적인 사건 대처는 종결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결국 그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더 끔찍한 재난을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조리적 상황은 특정 사건이나 재난이 발생했을 땐 여실히 드러나지만 평소의 일상에서는 그 형체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잠잠히 묻혀있습니다. 또한 ‘부조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추상적이어 그것이 무엇인지 찾는다고 해서 바로 손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세월호 사건은 알베르 까뮈의 저서 「페스트」에 등장하는 전염병인 ‘페스트’를 맞닥뜨린 오랑 마을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실 오랑의 시민들은 그들의 작은 도시에 페스트가 덮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필이면 자신들의 도시가 쥐들이 밖으로 기어나와 죽고 수위가 괴상한 병으로 목숨을 잃는 도시로 특별히 지정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죠. 페스트의 습격으로 인한 이별에 대한 슬픔 그리고 광풍처럼 몰아치는 전염의 목격에 대한 공포는 역시 마을 사람들을 동요시키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사를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질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자신한테 직접 다가오지 않는 한 자기들의 습관을 방해하는 일종의 이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애도를 하고 화를 내봐도 그뿐일 뿐, 결코 페스트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사망자의 증가를 현저히 느낄 수 있던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단지 이를 ‘가슴아픈 사건’으로 생각할 뿐 결국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도 자신이 갑자기 들이닥친 부조리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연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세월호 침몰과 상당히 먼 곳에서 편안히 앉아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결국 각개인은 일상 생활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오랑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는 재앙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집단적인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며, 초기에 가졌던 뜨거운 눈물은 제쳐둔 채로 이제는 일상의 이성을 움켜쥔 사람들의 말입니다. 페스트가 퍼지고 있는 상황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그렇게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상황에 대한 고통에도 무뎌지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절망에 습관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절망 그 자체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페스트를 앓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며 사회악을 인식해 이에 반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또 부조리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더라도 사실 내면을 깊숙이 살펴봤을 때 자신 역시 페스트를 앓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물급의 페스트 환자들이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개인의 지지를 요구했을 때 또한 나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그러한 지지를 보탬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죽음의 수렁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위선적인 마음에 놀라곤 합니다. 일단 한번 양보하게 되면 끝도 없이 양보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시민으로 여기며,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페스트 환자들의 요구를 용인한다면, 결국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형 선고를 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알베르 까뮈는 「페스트」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 만연히 퍼진 페스트, 즉 부조리에 전염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을 해야 하며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되찾을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살피지 않았을 때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 병독을 옮기고 맙니다.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며 따라서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보다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더욱 피곤하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 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 만연한 부조리를 부정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극도의 피로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름도 없는 바다무덤 속에 허망하게 묻혀버린 사람들과 더불어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그의 가족들에게 페스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미 그 페스트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재난이 종결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페스트는 우리 일상의 모든 곳, 우리들의 마음 속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채로 사람들이 자신을 망각할 때까지 살아남아 있다가 다시금 나타나 사람들을 흔들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4·11 세월호 참사는 무너져가는 한국 상황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이를 계기로 삼아 차후 절대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강렬한 경고일지 모릅니다. 충북대 행정학과 이재은 교수는 가까운 시일 내 세월호 사건보다 더 큰 안보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 있음을 밝힙니다. 바로 고리원전 1호기입니다. 지난해 원전 폭발 직전 상황까지 간데다 소위 ‘원전마피아’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유착 그리고 이를 용인할 수 있는 시스템의 존재로 인해 사람들은 그 위험을 쉽사리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국가와 기업의 안전 시스템 부재가 드러난 상황에서, 고리원전을 소홀히 할 경우 이를 훨씬 더 뛰어넘는 극한의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생각입니다. 일상에 널리 잠식돼 있는 부조리를 지금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진 몰라도 한 번 눈에 띈 페스트가 망각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됩니다. 자본을 우위에 두는 태도는 결국 참사를 일으키나 망각의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재발하게 됩니다. 후쿠시마 비극이 아직 생생한데도 불구하고 무역적자를 핑계로 원전 재가동을 밀어붙이고 있는 일본 아베 정권의 정책이 남일 같으십니까? 원전마피아들의 유착으로 인해 사고의 위험성이 나날이 커져가고 있는 이 때 정작 이들을 척결하고 원전 감독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에는 손도 대지 않는 우리나라 정부의 상황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