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호] 대한민국 극우파 ‘일간베스트’의 출현과 전체주의의 기원

2015-02-03     배완근(기술교육09)

발행: 2014. 05. 18.

  2014년 봄, 지금의 한국교원대 커뮤니티 ‘청람광장’은 그야말로 똥통이다. 더 이상 다른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게시판은 난잡하기 그지없다. 여성 비하 발언과 자살 추천과 같은 인격적 비하 표현이 난무하고 있고 이는 일간베스트 저장소(이하 일베)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들과 특징이다. 여기에 필자는 ‘일베’라는 집단이 사라져야 할 절대악이라는 생각보다는 그 집단에 대한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단지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라고만 알고 있던 그 집단은 더 이상 한낱 유머 커뮤니티로 보기 힘들었고 전례를 살펴볼 때 이와 유사한 집단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극우파로서 출현한 ‘일베’라는 세력에 대해서 그 정치적 함의는 무엇이며 이것이 어떠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논해보고자 한다.
  일베의 특성이나 잠재된 위험을 논하기에 앞서 이러한 집단이 등장하게 된 배경인 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의 한국은 정착된 법과 제도, 민주주의의 발전 등 그럭저럭 선진국의 반열에 다가선 국가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무한 경쟁의 시대, 개인주의의 시대로 돌입한 이후 개인의 사회적 위치는 오히려 더더욱 불안정해졌다. 또한 끝없이 거대해지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은 언제라도 버려지고 교체될 수 있는 부품으로 존재하기에, 개인들은 안정을 찾지 못한다. 기반을 잃고 불안감에 떨고 있는 개인들의 모습은 일면 19세기 자본주의가 시작되며 등장한 폭민(mob)과 비슷하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19세기 독일의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이 ‘폭민’을 꼽는다. 당시 근대 폭민의 등장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해 경제적으로 몰락한 ‘모든 계급의 폐물들’로 구성되었고 이는 현대의 모습과는 조금 괴리가 있다. 하지만 불확실한 사회 속에서 개인으로 존재하며, 억눌린 분노를 표출할 통로를 기다리고 있는 ‘폭민’은 현대 개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과거에 그랬듯이 현대 사회에서도 불안정한 개인들을 이끌어줄 강력한 이념에 대한 수요가 발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개인화된 세상과 모호함의 세상을 역설하며 개인들의 앞에 산재한 문제들을 단칼에 해결하고 정확함의 세상으로 이끌 ‘칼’(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알렉산더의 칼)의 수요가 생긴다고 비유한다. ‘칼’이 가져올 세상의 모습은 불확실성도 없고 그로 인해 겪던 개인의 고통도 없는 세계이다. 하지만 그 세상은 단지 미끼에 불과하고 칼의 이면에는 어떤 위험이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대 대한민국 사회 속에 등장한 ‘일베’는, 힘없는 개인들이 모여서 매듭을 끊을 칼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장場으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다룰 일베의 특성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분류된다.
  첫 번째 특징인 민주주의와 진보 세력에 대한 혐오는 일베의 정치적 특성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낸다. 사실 보수 성향의 정치 세력은 지금까지 수없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보수 세력은 민주, 자유에 대한 혐오보다는 단순히 경제 발전과 국가를 조금 더 우선시하는 형태에 그친 반면 일베의 경우엔 민주주의와 개혁 등,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사회를 구축해왔고 또한 정당하다고 평가받던 가치들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고 있다. 또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베가 가지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반공논리는 극단적으로 발전했다. 이들에게 국가의 발전과 ‘적’(북한)에 대한 경계는 절대적인 가치이며 그 가치 앞에서 개인이라거나 평화 따위의 요소들은 무시되어도 좋다고 평한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평가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전체’를 위해 다른 모든 가치들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핵심이 되는 논리이다.
  둘째는 여성혐오, 특정 지역에 대한 혐오이다. 이 집단의 한국 여성에 대한 혐오는 이제 유명할 정도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징병과 결혼, 데이트 등의 금전 문제들에서 남자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인식이 만연해있다. 이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일베에서는 이러한 인식만으로도 여성혐오가 발달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여성 혐오는 맹목에 가깝고 그들의 잣대대로 한국 여성들을 평가하여 극소수의 ‘개념녀’와 대다수의 ‘김치녀’로 엄격하게 구분한다.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 역시 마찬가지다. 전라도 지역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악의 근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혐오가 뜻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차별이다. 파시즘의 특성으로서 인간 평등을 부정하는 것과 비슷하게 일베에서는 그들만의 잣대로 사람들을 구분 짓고 자신들과 반대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셋째로 언급할 일베의 폭력성은 아직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다. 지금까지 일베의 이름으로 터진 사건들은 일부 비상식적인 사람에 의한 것이었고 심지어 이들 내부에서조차도 맹비난을 받던 사건이기에 단지 이것만으로 일베의 폭력성을 가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안녕 대자보 훼손 사건’은 일종의 테러에 가깝다. 특히 일베에서는 이들을 ‘행게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조금 더 특별한 존재로 바라봐주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가진 불만을 지지해주는 절대 다수(일베 내에서만)가 있을 때 이들의 폭력성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아직은 비교적 온건한 형태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렇게 ‘행동을 불사하는 이념’은 금세 극단적인 폭력으로 변화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일베 용어’, 즉 언어적인 특성에 관한 것이다. 언어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던 19세기 독일에서 사용되던 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학살이라는 단어를 ‘안락사 제공’으로, 전쟁을 ‘독일민족을 위한 운명의 전투’ 등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이는 현재 일베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김치녀, 민주화, 전땅크 등등 수없이 많이 등장한 이른바 ‘일베 용어’는 그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한편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무디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민주화’의 경우는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인식이 전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반대를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칭하며 민주화를 조롱하는 것과 동시에 그 조롱을 그들의 생활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앞서 살펴본 네 가지의 특성은 전체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기보다는 전체주의의 조건이라거나 전체주의의 자양분인 ‘폭민’의 특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베 자체가 전체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베는 그 집단을 주도하는 명확한 세력 없이도 스스로 전체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다. 하지만 일베가 지향하는 정치 형태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정의’를 행하고자 하는 그 집단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집단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개인으로 존재할 뿐이고 각자의 개성은 사라져간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옳지 않은 것, 혹은 자신들의 신념과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가차없이 처단하고 승리를 얻고자 한다. 물론 기반이 되는 가치는 국가의 이익과 반공이며, 일베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국가 이익의 수호자로 여긴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박정희의 휘호가 되풀이되며 무언의 압박까지 주는 곳에서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국가의 모범적인 시민은 파블로프의 개이고 가장 기초적인 반작용으로 축소된 인간 표본’이다. 일베가 들이대는 잣대는 분명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 기준과 비슷하지만 정치적인 영역으로 갈수록 그 형태는 극단적으로 변화한다. 민주주의와 진보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은 21세기의 한국 사회에서 결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리라. 또한 그 잣대에 어긋나는 이들에게는 전혀 여유를 두지 않는 엄격한 경향을 보인다. 다원성의 사회에서 다름은 인간의 필수 요건이라 할 수 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잣대에 맞지 않는 것들은 그저 한 덩어리의 ‘적’일 뿐이다.
  의외로 일베의 구성원들은 인생의 실패자라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다. 한때 학력 인증 대란에서 보인 것처럼 일베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가 명문대로 칭해지는 서울 주요 대학들의 학생으로 있다는 것을 인증했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라고 평한다. 일베를 만들어 낸 것은 불확실성의 현대 사회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 구성원 개개인의 무사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원인이다. 이 무사유는 학업 성취 등의 면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지능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단순한 놀이, 유머 커뮤니티로 시작했지만 종래에는 스스로의 사유를 배제하고 판단 자체를 그 커뮤니티에 위임해 버린 결과가 지금의 일베이다. 일베의 구성원들이 아무런 사유 없이 집단의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서 더 이상의 판단을 포기할 때, 그리고 이 집단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이 등장할 때, 구성원들의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전체주의 정치는 우리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