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호/사무사] 언어가 멈추는 곳

2019-03-20     편집장

3월부터 쏟아지는 뉴스들을, 즉 승리를, 정준영을, 김학의를, 서울교대 국어교육과 남학생들을 보며 긴 글을 썼습니다. 그만하자고. 이제 멈춰야 한다고.

그러나 사실 나는 고작 두 호 전에 그 얘기를 이미 했습니다. 작년 11월에 쓴 글과 어젯밤에 쓴 글은 문장만 다를 뿐 완전히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몇 달 사이에 똑같은 글을 두 번 썼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무력감이 밀려왔습니다. 언제까지 당연한 말을 되풀이해야 하는 걸까요? 인간의 사유는 언어의 날개로 나아간다고 믿었습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론장에서, 하나의 논의가 마무리되면 더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논의로 옮겨 가면서, 그렇게 언어로써 무지를 극복하고 미지를 개척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는 왜 같은 자리를 맴돌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정치계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공간에서 여성은 오직 몸으로만 존재합니다. 여성의 몸과 그 이미지는 소비되고 매매되고 교체되는 재화입니다. 이 재화는 접대용으로 제공되거나(승리), 재미로 공유되거나(정준영), 등급이 매겨집니다(서울교대 남학생들). ‘정준영 동영상’이 한동안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권에 자리했다는 사실은 이런 시각이 일부가 아닌 보편의 것임을 증명합니다. 이곳에서는 피해자의 고통이 아닌 오직 몸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언어는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사물화된 몸 앞에서, 말해도 듣지 않고,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공고한 그들만의 연대 앞에서 나의-우리의 말하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자리를 맴돕니다. 나의 몸,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몸, 이곳이 언어가 멈추는 곳입니다.

재화가 된 여성의 몸에 언어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몇 백 원이면 여성의 몸을 불법 촬영한 영상을 구입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누구도 여성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주로 얼굴과 가슴과 엉덩이로 3등분되는 ‘몸의 시선’ 속에서, 여성의 견해와 감정과 주장은 완전히 무시되기 쉽고, 때론 그저 “시끄러운 여자는 싫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가 멈추는 곳, 어떤 말도 가닿지 않고 그저 맴도는 이곳에서, 그러나 나는 계속 말하고자 합니다. 재화로서의 몸을 거부하고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여성이 ‘ㅇㅇ녀’가 아닌 동등한 동료 시민이 되고, 여성의 언어가 혐오의 벽을 부수고 더 나은 논쟁으로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상상도 하지 못한 넓은 가능성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그 가능성을 향해 날리는 작은 종이비행기입니다. 아마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내게는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려줄 동료 여성들이 있습니다. 계속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