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호/교육탑] 공교육으로는 안 되는 수능, 국가에 손해 배상 청구
지난 해 12월, 교육관련 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하 사걱세)은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을 위반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걱세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이의신청 게시판에 역대 최다인 991건의 이의신청이 제기됐으며, 대부분 문제오류와 지나치게 높은 난이도에 대한 이의신청이 대부분이었다.”라며 국가는 피해를 입은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불수능’의 여파로 인한 이의신청 쇄도
지난 해 11월 15일, 학생들이 대학입시를 위해 응시하는 2019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치러졌다. 수능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대학입시의 결과가 좌지우지 되는 만큼, 중요하고 말도 많은 시험이다. 매년마다 수능의 난이도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긴 하지만 이번 수능은 남달랐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이의신청 게시판에는 역대 최다인 991건의 이의신청이 제기되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대학교 과정 수학 문제를 수능에 출제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처벌해 주십시오.’, ‘수능 문제 이렇게 난이도가 높아도 괜찮은가요?’, ‘올해 수능 국어가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행하면 풀어지는 겁니까?’ 등의 제목으로 다양한 청원들이 올라왔다. 올해 수능을 본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은 “1교시인 국어부터 시간이 부족해서 마킹을 다 못했다. 그러고 나니까 나머지 과목들을 풀 때엔 눈물이 났다. 이번 수능이 너무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 2019 수능은 고교 교육과정을 위반했는가?
사걱세는 지난 1월 31일, 2019 수능의 고등학교 교육과정 위반 사항을 분석한 내용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실제로 고교 교육과정만으로 대비할 수 없는 수능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하겠다는 다수 학부모의 민원이 본 단체에 접수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들의 피해사실 입증을 위해 각 과목 별 위반 사항을 분석하였다.
문제 분석에 앞서 평가원이 제시한 수능의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가원이 제시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성격 및 목적은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학 능력 측정으로 선발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는 출제로 고등학교 학교교육의 정상화 기여▲개별 교과의 특성을 바탕으로 신뢰도와 타당도를 갖춘 시험으로서 공정성과 객관성 높은 대입 전형자료 제공이다. 사걱세는 두 번째 목적에 집중하여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에서도 국가는 학교가 국가 교육과정을 준수할 수 있도록 책무를 다하고(법 4조)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할 것을 명시(법 4조)하고 있기에 당연히 국가가 출제하는 수능은 고교 교육과정을 준수해야 하며 이를 위반해 학생․학부모에게 발생한 피해도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걱세는 작년 12월 17일부터 올해 1월 25일까지 약 한 달 동안 2019 수능 중 ‘수학영역(가/나)’ 60문항과 국어영역 45문항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제시한 교육과정 근거에 의거해 분석했다. 분석 작업에는 현직 교사 및 해당 교과의 교육과정 전문가 10명(수학 5명, 국어 5명)이 참여해 교육과정 준수 여부를 판정했으며, 과반 이상의 의견을 최종 판정 결과로 채택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수학 가형’은 30개 문항 중 7개 문항, ‘수학 나형’은 30개 문항 중 5개 문항, ‘국어 영역’은 45문항 중 3개 문항이 고교 교육과정을 위반한 것으로 판정했다.
◇ ‘수포자’ 양산하는 학습 노동 강요
수학의 경우 “소위 킬러문항으로 불리는 수학 30번 문항은 고교 교육과정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최상위권 학생들에게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학습노동을 강요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수포자로 만드는 폐해를 양산한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수학 가형 30번 문제에 대한 교육과정 근거를 평가원은 “삼각함수를 활용하여 간단한 문제를 풀 수 있다”라고 제시했다. ‘교수·학습 상의 유의점’ 또한 분명하게 “삼각함수의 활용에서는 주어진 구간 안에서 해를 구하는 간단한 방정식과 부등식을 다룬다.”라고 말한다. 즉 교육과정에서 언급하고 있는 삼각함수를 활용해 간단한 문제를 푼다는 것의 의미는 삼각함수를 활용해 주어진 구간 안에서 해를 구하는 간단한 방정식과 부등식을 해결하는 것을 말하지만 30번 문제의 경우는 주어진 구간이 없어 무한히 많은 해를 구해야 하는 문제로 교육과정의 수준을 벗어난 문항이라는 것이다.
평가원은 30번 문항을 푸는데 필요한 교육과정 성취기준을 3개로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15개 정도의 성취기준이 필요하다. 문제는 고교 교육과정에서는 각각의 성취기준과 관련된 문제를 풀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10개가 넘는 성취기준을 인위적으로 통합하여 만든 문제는 그 취지에 어긋난다. 이러한 수능 출제 경향은 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에 대한 이해보다 고난도 문항에 대한 반복적인 연습만을 강조해, 결국 개념은 없고 풀이 방법만 남는 학습 노동 강요로 대부분 학생들을 수포자로 만들고 있으며 사교육을 통해 학습을 해야 킬러문항을 풀 수 있다는 불안과 사교육비 부담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 대학 전공 수준의 어려운 국어지문
국어 영역의 경우 출제된 문항에 사용된 제시문과 보기의 내용이 대학 전공 수준의 개념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LEET(법학적성시험)’, ‘PSAT(행정고시)’에 출제된 제시문을 공부하며 고난도 제시문에 대한 독해 연습을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2019 수능의 국어영역에서 고교 교육과정을 위반한 문항으로 판정된 42번 문항의 제시문과 ‘보기’가 대표적인 예시다. ‘모순 관계’, ‘무모순율’, ‘가능세계’, ‘현실세계’ 등의 개념과 <보기>에서 사용된 ‘반대 관계’와 같은 개념들은 대학 철학과 전공과목인 논리학 중 고전 논리에서 배우는 ‘명제의 논리적 관계’와 관련된 개념이다.
이처럼 독해 난이도가 높은 수능 문제를 풀기 위해 수험생들은 LEET(법학적성시험), MEET(의학교육입문검사), PEET(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 PSAT(5급 행정고시) 기출문제를 변형한 수능 심화 문제 대비 교재를 사서 풀거나 사교육 기관의 관련 강의를 수강하는 실정입니다. 즉 고교 교육과정으로 도저히 대비할 수 없는 수능 문제를 풀기 위해 대학생이나 대학을 졸업한 취준생의 수험서를 공부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학습 고통은 물론이고 사교육비 부담이 전가된다고 말한다.
◇ 2019 수능 응시자들의 입장은?
이번 수능이 고교 교육과정과 얼마나 어긋난다고 느꼈는지 수능 응시자들에게 물어봤다. 전주고등학교 이건우 학생은 “과목별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수학과 사탐은 개념이 주라서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생각했는데, 수능특강을 제외하고 교과서만 봤을 때 국어랑 영어는 교육과정 외에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게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다른 익명의 응시자는 “솔직히 수학, 영어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생활과 윤리 3번 문제에 등장하는 니부어의 애국심과 관련된 내용은 교육과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사걱세의 입장이 조금 억지스러운 것 같다. 교과과정을 벗어난 정도의 문항은 없었던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걱세는 2월 둘째 주에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장을 제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 년마다 국가의 중요한 행사처럼 치러지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대학교 입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사걱세의 분석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판결 결과도 미지수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쟁을 부추기고 우열을 가르는 판 가르기 시험이 아니라, 학생들의 노력의 결과를 측정할 수 있는 본래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