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호/사무사] 합리적 선택의 대가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됐다. 내년 3월 보궐선거에도 후보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1년 동안 총학을 ‘경험’했던 우리는 다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돌아가게 된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학교에 총학이 존재했던 시간은 2년 3개월에 불과하니, 어쩌면 우리에게는 ‘비상’ 체제가 더 익숙하고 편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선거가 무산된 것은 별로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우리학교는 2008년 제24대 총학 선거 무산 이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6년에도 후보자 없음으로 인한 선거 무산을 겪었다. 올해까지 합치면 11년 동안 총 7번 무산된 셈이다. 그중 2013년, 2014년, 2017년, 그리고 총학이 3월에 자진사퇴한 2016년은 보궐선
거에마저 후보자가 나오지 않아 총학이 없는 채로 보내야 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라면 사건이겠지만 매년 발생한다면 현상이라고 부르는 게 옳다. 아무도 학생의 대표자로 나서지 않는 것도 현상이고, 아무도 학생의 대표자로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무도 충격 받지 않는 것도 현상이다. 제30대 새로고침 총학은 1년간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학생자치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실패했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달 말에 임기를 마치는 새로고침 총학의 1년을 떠올려보자. 새로고침은 2016년 3월 이후 만 2년간의 학생자치 공백기를 깨고 등장한 ‘귀한’ 총학이었다. “과에서, 자치기구에서 이루어진 고민들을 거시적인 변화로 이끌 무언가가 부족함을 느꼈다. 학우들의 필요를 느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통로가 미비한 상황을 겪었다”면서 대표자를 자처한 그들, “내 능력을 학우여러분이 더 나은 학교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사용한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사하고 축하받을 만한 일이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이 샘솟는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던 그들은 곧 싸늘한 무관심에 맞닥뜨렸다. 학생총회 무산을 막기 위해 제시한 정족수 변경 안이 학생총회가 무산되어 통과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블랙코미디가 임기 내내 펼쳐졌다. 결과가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날선 비판은 덤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무슨 일이 생기면 청람광장에는 늘 총학을 찾는 글이 올라왔고, 그때마다
총학은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 대응 상황을 설명했다. 모두가
총학을 찾았고 총학은 늘 응답했지만, 총학이 우리를 찾을 때 우리는 없었다.
물론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학생 대표의 당연한 의무다. 총학을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비판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1년간 우리의 태도는 대표자를 대하는 학생보다는 서비스 제공자를 대하는 소비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우리는 총학을 ‘호출’하고, 총학의 여러 사업을 ‘소비’했으며 그 결과를 ‘평가’했다. 청람광장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총학 실망이네요’ 같은 댓글들은 비판보다는 서비스에 불만족한 소비자의 한줄평으로 읽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총학이 서비스업체로 전락한 것은 비단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학생자치 무용론은 꽤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학생총회는 3년째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고 있고, 하반기 학생총회가 무산된 지는 6년이 넘었다. 학생회비 납부율은 매년 감소 중이다. 총학이 학생운동의 선두에 서서 진보, 정의 같은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이제 학생들은 총학생회장이 말한 ‘거시적인 변화’보다는 대동제에 유명 연예인을 섭외해주기를, 학과별 간식 지원금을 늘려주기를, 청람체전 종목에 이것저것을 추가해주기를 더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으니, 금전적 거래를 전제로 한 서비스업체와 소비자의 관계와는 달리 총학과 학생의 관계는 총학의 일방적인 봉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와 일꾼, 두 개의 역할을 도맡느라 총학의 책임은 매일 커져가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많지 않다. 명예도 특권도 금전적 보상도 없이, 한줌의 보람과 응원만으로 떠안기에는 그 책임과 희생의 무게가 지나치게 크다. 여기에 한 톨 티끌도 없이 순정하고 냉엄한 비판의 무게가 더해지면, 더 이상 “우리가 너희를 뽑았잖아”라는 말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거대한 불균형이 초래된다.
이런 상황에서 후보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자진해서 고생길로 뛰어들겠는가. 어쩌면 우리에게 어울리는 학생자치는 지금 이 비상사태, ‘총학 후보자 없음’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치(自治)’, 즉 스스로 다스리는 자에서 소비하는 자의 자리로 떨어뜨렸다. 총학 선거 무산이 그 대가다.
L교수의 파면 촉구 운동이 한창이던 때, 아무리 말해도 묵묵부답인 학교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무기한 단식을 선언한 총학생회장을 향해 어리석다느니 섣부른 결정이라느니 비판하던 이들을 기억한다. 이중 몇 명이나 파면 촉구 집회에 참석했을지는 의문이나, 그들의 논리 정연한 말투는 참으로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들렸다. 이들에 비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상해 가면서 학교와 투쟁하는 총학생회장은 미련해 보였다.
어쩌면 이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와 별 상관도 없는 학생자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대표로 나서는 것, 아무런 대가도 없이 봉사정신만으로 무거운 책임을 떠맡는 것 전부 바보들이나 할 만한 미련한 일일지도 모른다. 총학이 서든 비대위가 서든 내 인생이나 열심히 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현명해지고, 미련한 이들만이 어렵고 외로운 자리에 남아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미련한 이들이 모두 사라진 합리적이고 현명한 사회는 어떤 곳이 될까. 내년 3월 보궐선거에서도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1년간 그곳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