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호/독자의시선] 조르바와 순례자

2018-10-16     최수아(불어교육·13)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카잔차키스의 묘비 뒷면에 적힌 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앞에 섰다. 나를 크레타 섬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묘비를 보러 가는 길에는 마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처럼 마음이 경건하고 먹먹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이래 조르바처럼 살길 바라왔다. 작품의 배경이 된 크레타 섬의 해안에서 그를 그려보고 싶었다. 모든 사물을 볼 때 마치 처음 보는 것인 마냥 감탄하고, 매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열정의 소유자.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솔직함과 대범함,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기에 얻을 수 있는 자유……. 나도 조르바처럼 삶을 거리낌 없이 대하며 오직 직관에 귀 기울이는 대범함을 가지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 무엇도 바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로, 식료품 상인처럼 쩨쩨하게 굴지 않은 채로, 럼주를 들이키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향유하는 조르바의 삶을 동경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생전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인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자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은 “왜요?”하고 반문한다. 그러자 조르바는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안 됩니까?”라고 대답한다. 조르바는 무언가를 바라고, 무언가를 위해 행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삶의 직관이 따르는 대로 흘러갈 따름이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내가 무엇을 바라고 이를 지속해 나가고 있는지 고민한 적이 있다. 가면 갈수록 여행의 목적이 모호해지고 그저 되는 대로 다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사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목적이 모호할수록 ‘자연스러움’에 가까워진다. 목적은 때로 인위적일 수 있으니. 아무리 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카프카의 ‘성’을 향하는 측량사 K처럼, 그 자신의 인생을 향유하는 데에만 몰두했던 조르바처럼, 인생을 정의내리지 않는 자들만이 자유를 느낀다. 우리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정의내릴 수 있는 건 없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무언가를 바라거나 두려워하게 되면 사슬이 생긴다.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여도 사실 그 사슬에 묶여있는 범위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일종의 한계이자 틀이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내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람과 두려움은 늘 공존한다. 늘 마음속에 품어왔던 생각, ‘내가 원하는 대로’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여행이 흘러가길 바라지 않는 두려움 역시 존재했다. 희망과 두려움은 늘 함께 있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에겐 희망도, 두려움도 없다. 희망도 두려움도 없는 삶이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조르바가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 많은 사람들이 허무를 두려워했습니다. 나는 허무를 극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렵게 생각했지만 내겐 그럴 필요가 없어요. 나는 좋다고 기뻐하지도, 안 됐다고 실망하지도 않아요. (..) 내게 여자가 있든 없든, 내가 정직하든 정직하지 못하든, 내가 파샤든 거리의 짐꾼이든 내겐 그게 그거예요. 중요한 건 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는 거죠. 》- 니코스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

희망과 두려움, 그 어떤 것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잠잠한 마음으로 ‘살아있음’ 그 자체를 느끼고 향유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카잔차키스와 조르바가 삶의 허무를 극복하는 방식이자 자유였다. 모든 것의 기준은 삶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중요할 터였다. 결국 <성>의 K 역시, 그가 성에 이를 수 있느냐의 여부보다는 그가 ‘살아서’ 성을 탐색하는 그 생의 순간들, 사진을 찍듯 무수한 찰나를 포착할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에 골몰하는 편이 좋으리라. 성을 탐색하되 성이 목적이 되지 않는 삶, 이를테면 무언가에 이르고자 하는 그 노력, 그 과정을 즐기는 삶. 

스페인 북부에서 900km에 달하는 거리를 횡단한 적이 있다. 목적지로 점찍어 두었던 서쪽 땅 끝 피스테라에 어떻게든 도착하려 아등바등 나아가고 있던 터였다. ‘언제 도착할까’ 한숨을 푹푹 쉬던 게 일과였다. ‘땅 끝’에 도달한다는 게 내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나아가려 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 다리 난간에 아무렇게나 쓰인 프랑스어 글귀를 우연히 읽고선 깨닫는 게 있었다. “길이 목적 그 자체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

《 당신은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처음엔 여행이 고문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 여행이 기쁨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지요. 그것은 탐색과 모험이 주는 기쁨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가장 중요한 당신의 꿈들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
- 파울로 코엘료,「순례자」

탐색과 모험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지 못한 채 그저 목적지만 향해 걷는 건 정말이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하는 것보다도 그 곳에 이르는 데 필요한 노력 자체가 삶을 영글게 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과정을 곧 목적으로 둔 이후에는 걷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비 오는 날 우비를 뒤집어쓰고 몇 개의 언덕을 넘은 뒤에야 나타난 시골 마을과의 만남,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소시지를 까먹는 기쁨이란 다름 아닌 과정이 주는 행복이었다. 발이 아프고 먹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먹지 못하며 외국어가 유창하지 않아 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더 이상 나 자신을 다그치지 않으니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찾아왔다. 땅 끝에 반드시 도착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린 채로 흘러가는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조르바의 말마따나 ‘살아있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건 없다. 과정이 곧 목적인 지금 이 곳에서 이 순간을 즐기며 탐색과 모험이 주는 기쁨을 만끽해 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