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호] 5·18이 이루어낸 시대
발행: 2014. 05. 18.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하 5·18) 이후 30년이 흘렀다. 30년이 흘러도 민주화운동의 본질과 의의는 그 가치를 잃지 않는데도, 이를 둘러싼 시선은 무뎌지거나 왜곡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5·18이 북한에 의한 폭동이었다는 루머까지 제기하며 가슴 아픈 역사의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5·18의 태동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쿠데타에 반발한 대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신군부 쿠데타에 대항하며 서울역에서 있었던 대대적 학생 시위는,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의 시위 해산 결정과 함께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후 5월 17일 계엄령이 반포되고 재야인사들과 대학생들의 체포가 이어지며 민주주의로의 걸음은 다시 한 번 멈춰야 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민주 대성회라는 이름으로 시위가 계속됐으며, 참여자들은 만약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지침을 정했다. 5월 18일 계엄령에 따라 휴교령이 내려지자, 전남대 정문에서는 전남대생들과 계엄군 간의 충돌이 있었다. “계엄군은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에게 계엄군은 무력으로 대응했고, 학생들은 시내로 나와 행진했다. 계엄군은 이 시위를 진압하며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해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후 27일까지 이어진 5·18은 숱한 사망자와 부상자를 낳았다. 아직까지도 누가 내렸는지 모르는 발포 명령에 따라, 계엄군은 발포를 시작했고 이 날만 56명이 사망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하여 대응했다. 당시 언론은 시민들이 왜 무장하였는지는 다루지 않고, ‘무장한 시민군로부터 무고한 시민을 지키기 위해 계엄군이 무장대응하고 있다’며 잇따라 보도에 나섰다.
집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숱한 피해자를 양산한 5·18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전두환을 위시한 사건 관계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5·18이 일어났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도) 5·18을 북괴에 의한 ‘폭동’으로 격하시키며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5·18에 무뎌져 가는 우리이다.
가슴 아픈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훗날 어리석은 세대로 규정될 것이다. 5·18은 시민 스스로 군부 독재에 저항하며 자발적으로 싸웠다는 점에서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사건이다. 우리는 5·18에 대해 연구하고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과거를 탐구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걸음의 초석이 된다.
오판으로 인해 수없이 좌절됐던 우리의 역사를 반성하는 것은 현재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얼마나 큰 무게를 지니는지 기억하게 한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했던 과거의 흔적들에 무뎌지지 않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과거와 현재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5·18이 이루어낸 시대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