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호] 역사상 최대의 현미경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onseil Europeen pour la Recherche Nucleaire, CERN)에서 빅뱅을 재현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는 소설 ‘천사와 악마’의 배경 스토리다. CERN은 소설을 넘어 현실에서도 힉스입자를 발견해내는 등 우주 탄생의 비밀을 밝혀내고 있다. CERN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대형강입자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LHC)가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충돌이 필수로 이뤄져야 한다. 망원경으로 물체를 관측할 때는 빛과 물체의 충돌이, 태아 초음파 사진을 볼 때는 초음파와 태아의 충돌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원자 단위 이하의 미시 세계를 관측할 때도 충돌이 전제돼야 한다. LHC도 양성자끼리의 충돌을 통해 원자 단위 이하인 소립자를 관측
할 수 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져있는데, 원자핵은 다시 중성자와 양성자로 나뉠 수 있다. 여기서 중성자와 양성자와 같이 원자핵보다 작은 입자를 소립자라고 부른다. 강입자(Hardon)는 강한 상호작용을 하는 소립자를 가리키는데, 양성자 역시 강입자
로 분류된다. LHC는 소립자를 관측하기 위해 시계방향, 시계반대방향으로 양성자를 발사해 양성자끼리 충돌시킨다.
양성자끼리 충돌하는 과정에서 양성자는 쿼크나 글루온 같은 소립자로 분리된다. 신의 입자라 불리는 ‘힉스입자’ 역시 소립자이며, 이 과정에서 관찰될 수 있다. 실제로 CERN은 LHC를 이용해 힉스 입자가 존재함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이렇게 양성자끼리 충돌시켜 소립자의 세계를 관측하기 위해서는 큰 충돌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비단 양성자를 소립자로 깨뜨리기 위해서이기 뿐만 아니라 충돌에너지가 소립자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소립자에 더 많은 에너지가 전달될수록, 소립자의 상호작용 등을 보다 더 선명하게 관측할 수 있다. CERN의 LHC가 주목 받는 이유도 전 세대의 강입자충돌기보다 더 큰 에너지로 양성자를 충돌시키기 때문이다.
충돌하는 물체의 속도가 빠를수록 충돌에너지는 커진다. LHC 내의 양성자에 전위차를 갖게 하여 광속에 가깝게 가속시켜 충돌시키면, 양성자 각각은 자기 질량의 7천배에 달하는 에너지로 충돌한다. 이에 전체 충돌에너지는 양성자 질량의 1만 4천 배에 이른다. 이는 빅뱅 직후 약 1천억 분의 1초가 지난 우주의 에너지량과 같다. LHC가 있기 전에 최대의 입자충돌기였던 미국의 테바트론이 양성자를 자기 질량의 1천배의 에너지로 충돌시킨 것을 볼 때, CERN의 LHC는 큰 발전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양성자의 충돌에너지는 LHC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소립자의 상호작용 등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소립자가 양성자에서 분리가 되더라도 상호작용이 일어날 확률은 낮다. 즉, LHC가 양성자를 깨뜨리고, 높은 충돌에너지를 소립자에 전달하더라도 소립자에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발견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LHC는 매초마다 발사하는 양성자의 개수를 사상 최대로 늘렸으며, 많은 수의 양성자가 충돌하게 한다.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 확률은 낮지만 시행횟수가 많은 만큼, LHC를 1년간 구동했을 시에 30만 번 정도의 의미있는 결과를 얻게 된다. 이렇게 지름 9km, 둘레 27km의 거대한 원형 현미경인 LHC는 지금도 수많은 양성자를 쪼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