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호/시론] 대학의 조건

2015-02-03     김한별(교육학) 교수

발행 : 2014. 3. 31.

대학이 사회로부터 ‘대학’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대학이 ‘학교’라는 본질적 특성을 견지할 수 있는 핵심은 무엇일까? 필자에게 지난 얼마간은 이런 물음을 스스로에게 되뇌였던 시간이었다. 얼마 전 학사운영과 관련하여 개설강좌 가운데 수강인원 미달로 인한 전공 및 교양강좌의 폐강이 있었다. 학기마다 늘 있어왔던 일이기에 새삼스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올해는 형평성의 추구라는 이유로 각 강좌의 특수성에 대한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일괄적으로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정은 강사 수 증가에 따른 대학의 재정적 압박을 감소하고, 대학평가에 있어서 불이익을 미연에 방지하게 위해서라고 한다.
대학 전체 학사관리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닌 듯 싶다. 그런데 못내 불편한 사실은 학생들의 학습권과 학사행정의 효율적 집행이라는 두 가치에 있어서 학사관리를 위한 일률적 폐강의 불가피함에 대한 양해를 구하려는 최소한의 노력과 설명은 있지만, - 말 그대로 최소한의 노력과 설명이다 - 그로 인해 훼손되는 학생들의 학습권에 대한 이해나 대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소수 강좌에 대한 행정적 처분이 내려짐으로써 학생들의 진로와 배움의 요구는 고려되지 못하고 강좌와 함께 폐기되어져 버린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대학의 장점으로 주장하는 학생의 강좌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표현은 사실 일정한 수강인원이 보장되는 강좌에 한해서 선택적으로 그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강좌가 학생 개인이 꿈꾸는 진로를 설계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다음 학기까지 그 수강이 유예되기 어려운 상황이며, 그리고 그에 대한 사유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확인 작업을 생략한 채 오직 최소 수강인원이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강을 해버리는 우리 대학의 현실에서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과 권리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사실 학생들이 우리 대학을 선택하고 진학하는 것은 이들이 우리 대학의 존립을 뒷받침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대학에서 접할 수 있는 교육 경험이 단 한 번의 자신들의 삶을 가꾸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학을 위해서 학생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운영에 있어서 학생들의 역할과 참여가 중요하며, 만약 이들의 실질적 참여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이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의적으로 대학의 운영, 특히 이들의 직접적 이해가 걸려있는 학사에 반영할 수 있는 구조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대학은 조직이자, 기관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대학은 고등교육 수준의 배움을 제공하고 돕기 위한 조직이자 기관이다. 학생들에 대한 배움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와 제도적 관리가 우선시된다면 대학은 ‘대학’이라는 명칭으로 스스로를 표기할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대학이라고 할 수 없다. 대학이란 곳은 다양한 이해와 관점이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서 협상되고 또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사회적 공간이기 전에 그 어떤 활동보다도 교육이라는 행위가 가장 핵심이 되며 보호되어야 할 공간이다. 법정에서는 정확한 판결이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받아야 하고, 시장에서는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가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받아야 하듯이, 학교에서는 배우는 자의 온전한 성장을 돕는 교육 행위가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받아야 한다. 교육의 가치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양하는 데 있다. 어떠한 제도나 구조에 속박되어 살아지는 개인이 아닌, 일종의 자활(自活)적 개인으로서 성장하는 것이 교육이 담아내야 할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대학교육을 통해서 접하는 경험이 합리적 학사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준거가 되어야 한다. 배우는 자에 대한 고려가 다른 현실적 제약과 관심에 밀릴 수밖에 없다면 대학이 실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모습은 사실상 영혼없이 학위을 찍어내는 학위공장, 디플로마 밀(Diploma Mill)일 수밖에 없다.
대학이 공공성을 지니는 ‘학교’일 수 있는 때는 학생들의 배움과 배움에 기초한 이들의 삶이 존중받을 때이다. 이런 가능성은 학생의 배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배움의 가치가 시대가 요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더라도, 또는 금전적 편익의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학생 개인의 삶에 의미로운 것임을 인정하고 관용할 수 있는 태도로부터 나올 수 있다. 사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인문학의 가치도 따지고 보면 부가가치의 효율적 창출에 주목하는 자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비효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배려할만하고 존중할만한 것만 챙기는 것은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도 이미 충분히 해내고 있다.
대학이 비즈니스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금전적 편익이 강좌의 개발 및 운영과 같은 대학교육 활동을 지배하는 논리가 됨으로써 ‘대학교’라는 이름보다는 ‘대학기업’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지 않기를 바란다. 교육 외적인 논리에 치중한 대학 운영의 함정은 언젠가 교육 분야의 특수목적대학인 우리 대학 전체의 존립 문제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부디 그 때 우리 대학 설립의 특수성을 사회적으로 항변하는데 궁색해지지 않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