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호/기자칼럼] 용서하는 사회
우리는 흔히 독일을 같은 전범국인 일본과 비교하며, 과거 청산에 적극적인 역사 모범 국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독일이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 독일인의 다수는 “나치즘 자체는 좋은 생각이었지만, 이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었다”라고 여겼다.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인들 또한 유럽 전역에서 추방과 보복을 당하며 자신들을 또 하나의 피해자로 인식했다. 실제로 전쟁 범죄의 주체는 일부 군인과 지도층이었지만, 일반 시민들도 피해를 보았기에 피해의식을 품게 된 것이다. 일본 역시 원자폭탄 투하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보며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자’로 인식했다. 그렇기에 독일이 전쟁 피해국인 폴란드에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독일이 지금의 ‘성찰하는 국가’로 변화할 수 있었던 계기는, 뜻밖에도 폴란드의 ‘용서’였다. 종전 20년이 지난 1965년 11월 18일, 폴란드 가톨릭교회 주교단은 독일의 가톨릭교회 주교단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그대에게 용서를 베풀며, 또 그대의 용서를 구한다”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핀란드가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자, 역사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독일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70년 12월 7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독일을 대표해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이후 독일은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나치의 만행과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교과서에 상세히 기록하고, 시민교육을 통해 역사적 책임 의식을 길러왔다.
기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에는 언제나 용기 있는 시작이 필요하다. 폴란드가 독일을 용서하고, 동시에 스스로 용서를 구한 그 결단이야말로 세상을 바꾼 첫걸음이었다.
이처럼 용서란 상대의 잘못을 꾸짖기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사회에서는 ‘용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용서를 ‘손해’로 여기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을 순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행위다.
심리학자 프레드 러스킨은 “용서란 평온한 감정이다.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고, 피해자가 아닌 승리자가 되었을 때 생겨난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용서는 단순히 ‘상대의 잘못을 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용서는 피해자에게서 가해자에게로 향하는 다리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 감정은 결국 자신을 옭아매고, 일상과 생각을 잠식한다. 미움이 깊어질수록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오히려 더 커져만 간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타인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해방의 선언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점점 ‘무관용의 시대’로 흘러가고 있다.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은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그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멈추지 않는다.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무관용의 문화’는 정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타인의 실수를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냉혹한 시선이 숨어있다. 물론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릴 때, 사회는 점점 더 차가워진다.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려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는 결국 성장하지 못한다.
용서 없는 사회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사회다. 역사적 상처든 개인의 관계에서 생긴 상처든, 그것을 외면하거나 보복으로 되갚으려 할 때 고통은 되풀이된다. 반면 용서는 기억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 기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폴란드가 독일을 용서한 것은 과거를 잊겠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되, 그 위에 새로운 관계를 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바로 용서의 힘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제는 이런 용서의 문화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실수를 단호하게 지적하는 것만큼, 그 실수 이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태도 또한 중요하다. 용서는 정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진정한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되,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서로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에 있다.
결국 용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선택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다시 한번 믿어줄 용기를 낼 때 사회는 조금씩 따뜻해질 것이다.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가 한 국가의 역사를 바꾸었듯, 누군가를 향한 한 사람의 용서가 또 다른 기적의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