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호/교육현장엿보기] 사회의 민주주의는 학생 민주주의에서부터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이주원(역사교육·25)

2025-11-02     한국교원대신문

대학교 4학년 때 사범대 학생회를 운영해 보면서 처음으로 내 안에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있음을 자각한 이후 중고등학생 때부터 학생회를 운영해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교육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입시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중학교에서 학생자치회 업무를 맡게 되었다. 나처럼 덜렁대지만, 의욕이 넘치는 학생회장을 중심으로 서른 명가량의 학생자치회 친구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여러 행사를 기획했다. 그런데 바로 벽에 부딪혔다. 학생자치회는 자치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장 주요한 예시는 학교가 전교학생회장이 선거 당시 후보로서 내걸었던 두 가지 주요 공약들인 미니 체육 대회‘e-스포츠 대회를 교내 학업 분위기 저해의 이유로 불허한 것이었다. 학생회는 2·3학년의 시험이 모두 끝나는 12월에 실내 체육관에서 계주 대회만이라도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 겨울철에는 부상의 위험이 크다는 안전 문제로 역시 불허되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일반 학생들은 학생회가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출했다. 나는 학생자치회에 학생 자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사실상 없다는 점이 당황스러웠고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무력감에 빠져가는 모습에서 청소년기의 내가 보여 괴로웠다. 또한 자신들이 선출한 학생 대표들이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 현상을 보며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 선거라는 민주적 시스템에 대한 회의감이 퍼지고 있는 상황도 우려스러웠다. 학생회 담당 교사로서 학교와 학생들 사이에서 제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는 자책 속에 1학기가 갔다. 어느덧 2학기가 되었고 교장 선생님과 학생자치회의 2학기 간담회 날이 다가왔다. 간담회 내내 학생자치회 대표들은 일제히 미니 체육 대회‘e-스포츠 대회등 행사들을 하게 해 달라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이 두 가지 행사의 개최는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전교 학생회장의 공약이었으므로 이를 이행하는 것이 민주적인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간담회가 끝나고 학생들이 귀가하자 교장 선생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교사 편이 아니라 학생 편이었어요.”

이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같은 편인 교사들을 곤란하게 한 것에 대해 얼마간 잘못을 한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견 학교·교사와 학생 간의 대립으로 보이는 이 현상이 본질적으로는 학생 민주주의를 얼마나 보존하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곱씹어봐도 민주주의에 관해서라면 네 편, 내 편이 따로 없는 것이었다. 다만 학생회 친구들이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그래서 청소년기의 나처럼 매사에 순응하고 체념하며 수동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e-스포츠 대회를 추진해 보기로 했다. 학생회장의 노력 끝에 안전사고 예방책을 비롯하여 세부 시행안을 철저히 세운 계획서가 통과되었고 1주일 동안 전 학년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들도 참여하는 e-스포츠 대회가 열릴 수 있었다. 전 학년 학생들과 교사들이 다 같이 중계 화면을 보며 동시에 감탄과 환호, 통탄의 목소리를 내며 희로애락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자치회 학생들은 자신들의 그 아이디어가 학교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들로 실현되는 과정을 실감했고 그 속에서 자기 안의 주체성을, 그리고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토크빌과 모리치오 비롤리, 마이클 샌델 등 공화주의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서 시민들 안에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이 생겨난다고 했다. 학생자치회는 이런 시민성을 경험하는 풀뿌리 구성체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작은 공동체 속의 민주주의 경험에서부터 한 뼘씩 튼튼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