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호/기자칼럼] 우리는 왜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없을까

2025-03-09     정경진 기자

작년 1229, 179명의 사람들이 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처참하고 안타까운 사고였다. 이 참사는 2024, 1년을 마무리할 준비하던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냥 슬퍼하기만 할 시간을 온전히 누리기도 전에 참사 때마다 피해자들을 괴롭힌 ‘2차 가해는 이번에도 반복됐다. 희생자나 유가족을 조롱하거나 허위 정보를 담은 악성 게시글이 끊임없이 유포되었고, 희생자 대부분이 호남권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지역 비하 발언이 나오거나, 유가족이 보상금을 노리고 행동한다는 원색적인 비난, ‘가짜 유가족이 있다는 음모론까지 다양한 형태의 2차 가해가 발생했다.

또한 얼마 전,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던 배우 김새론은 과거 한 사건 이후, 수많은 악성 댓글과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고통받다가 결국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연예인이니까 악플도 감수해야지하는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어찌 보면 가벼울 수도 있는 생각이 때로는 그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내몰기도 한다. 미국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나종호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어야 숨 쉴 틈도 없이 파괴적 수치심을 부여하는 것을 멈출까. 사회적 대화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말 얼마나 많은 죽음이 더해져야 누군가의 고통을, 그리고 그 고통을 넘어선 죽음까지도 가벼이 여기는 이 뚜렷한 무책임이 사라질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이 덧대어졌다.

최근 많은 이들의 죽음을 접하며 사람들이 다른 이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그리고 나는 어떻게 죽음을 대해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일상을 살면서 수많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중에는 나와 관계가 있는 이들의 죽음뿐 아니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의 죽음도 경험한다. 강남순 교수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철학을 입체적으로 다룬 책 데리다와의 데이트에서, 자크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부제로 삼았다. 강남순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순간 애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음 앞에서 진정한 애도는 무엇이며, 나는 어떤 애도하고 있고,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애도란, 말 그대로 애도哀悼(슬플 애, 슬퍼할 도)’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내 기준을,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진심을 다해 슬퍼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슬퍼한다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 사회는 상실로 인한 슬픔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극복해야만 하는 문제로 여기는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마음 놓고 애도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다.

우리는 슬픔을 거세당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2014년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 2022년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그 당시 온 국민의 가슴을 비통하게 했다. 처음에는 모든 이들이 함께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듯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이태원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고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제 그만 슬퍼해라’, ‘그만 잊을 때도 됐지등의 말을 반복하며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사회는 죽음에 위계가 존재한다. 슬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죽음도 있고 그냥 잊혀버리는 죽음도 있다. 누군가는 애도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는 그 대상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픔의 권리는 인권이다. 애도할 권리, 애도 받을 권리 모두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하는 것이다. 애도하는 게 일입니다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주 가끔, 인신매매범과 가정폭력범, 성범죄자의 장례를 치렀다. 누군가 그들에 대한 애도가 진심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진심으로 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고인을 애도하는 것은 결코 그의 과거를 옹호하거나 용서해서가 아니다’” 이 저자의 말처럼, 애도하고 애도 받는 것이 당연해지는 사회, 죽음을 맞이했을 때만이라도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삼가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이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문장이다. 여기서 삼가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명복冥福어두울 명자에 복 복자를 써서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가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빕니다정말 진심을 다하고 예를 다하여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도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 된다. 누군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이야기할 때면, 나는 왠지 그 말이 마음껏 슬퍼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 누구도 선뜻 슬픔의 언어를 담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진심을 다해 상실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이 거짓과 피로가 아닌 진심과 위로가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