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호/독자의시선] ‘흐림’과 ‘분명함’의 경계 그 사이로

이예린(국어교육·22) 학우

2024-05-27     한국교원대신문

우리는 선택에 확신이 차 있거나, 일을 분명하게 해낸다거나,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을 때 칭찬을 받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분명하지 않음에 대해 칭찬받은 적이 있던가? 왜 무엇이든 뚜렷하고 명확하기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는 일분일초를 앞다투며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모든 것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게끔 만들도록 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분명하지 않은 이는 너무 외떨어진 것만 같기도, 홀로 날아가는 것만 같기도 할 때가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분명한 것과 반대로 필름 카메라의 시선과 같이 흐린 피사체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우리가 보는 시선의 경계를 명확하지 않게 하여 하나로 만들어 줌으로써 그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분명하지 않은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경계를 옅게 만들어 뒤섞이게끔 하는 것들을 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선택을 가장 두려워했다. 나는 불분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좋아함과 싫어함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었고, 그렇게 나의 취향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점차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경험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지금의 나는 그 누구보다 분명한 사람이 되었다. 자연을 좋아하고, 파란색을 좋아하고, 영화는 스릴러보단 로맨스를 좋아한다. 이런 점은 사람을 만날 때 더욱 확고해지기도 한다. 이런 분명함은 분명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이성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고, 나의 휴식을 더욱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금 그런 선명함을 무디게 만들고 싶어졌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도, 선호하지 않는 일에 뛰어들기도 하고 싶어졌다. 그런 새로운 일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색의 설렘을 느끼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의 확고한 경계는 다른 사람들과 나 사이를 멀어지게끔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속인 채로 예전처럼 남들만 따라가는 삶을 살고 싶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원하는 무딤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 이전의 나처럼 안에 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분명하게 하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 보면 산과 바다와 하늘이 무자비하게 보인다. 그때 우리는 그런 풍경을 줄자로 재단하여 산과 바다, 그리고 하늘을 나누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나눌 수도 없다. 이렇게 그사이를 나눌 수 없듯이 하나로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고 싶은 것이다. 확고한 나로 살아가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는 내가 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흰 도화지 위에 사각형의 상자를 그렸는데 원을 만들고 싶을 때는 모두 깨끗이 지워내고 다시 그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문질러 경계를 흐리게 할 수 있는 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런 취향이 아니라고 그 상자 안에만 나를 가두기보다는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흐린 상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지우지 않고서도 원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나 또한 모든 것이 줄로 잰 듯 반듯하기만 한 사람으로 올곧기보다는 흐린 틈을 만들어 다양한 것들에게 발 닿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끔은 그 경계, 나의 일관되던 모습을 무너뜨리고 함께 융화되는 모습이 그리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의 불분명함을 원망하지는 말고 하나의 나로 바라보는 건 어떨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