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호/교육현장엿보기] 아침 교문 앞 학생 맞이 단상

김동혁 용두중학교 교사

2024-03-25     한국교원대신문

-'권태와 듣기' 고찰

 

피에르 쌍소에 따르면 권태는 세상을 정직하게 활용하고, 세상에 더 다가가거나 벗어나거나, 세상을 더 재미있게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다시 음미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권태롭다는 것은 내 자신이 자신과 상대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상태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주는 알람이기 때문이다. 그 알람 소리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이는 노력을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놓치고 있었던 활기찬 생명력과 순수한 충동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선물로 얻을 수 있다.

 

피에르 쌍소는 권태를 잘 활용하는 방법으로 온천 도시 여행을 권한다. 온천의 모락모락 피어오른 하얀 김이 이른 아침 마을 곳곳을 가볍고 따뜻한 포대기처럼 살포시 덮는다. 느즈막히 일어난 사람들이 온천수에 함께 몸을 담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그 온기와 온기에 이완되는 자신을 자각한다. 이러한 온천 도시에서 삶은 소박하고 간결하며 반복적이기에 권태롭지만, 그 권태로움 덕분에 누구나 어렵지 않고 손쉽게 그 장면 안에 담긴 생명력과 여유를 새롭게 읽어내고 느끼며 음미한다.

 

매일 아침 815분부터 845분까지 학생 맞이 아침 교문 생활 교육활동을 한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얼굴을 맞추고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간단한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는 활동을 한다. 소박 단순 반복적 활동이기에 권태롭다. 그 권태로움이 나로 하여금 관성적이고 기계적으로 말하고 인사하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관성적으로 해왔던 행동들, 반복적으로 만나왔던 상황들을 다시 음미해 본다. 함께 서서 학생을 맞이하는 동료들이 매일 건네주던 아메리카노, 유자차, 대추차를 손으로 감싸 쥔다. 감싸 쥔 손에 그 온기가 시나브로 퍼지고 은은한 포근함이 심장까지 부드럽게 만든다. 홀짝홀짝 마시고 머금으니 입 안 가득 달콤쌉쌀함이 퍼진다. 함박웃음 같은 미소가 그려진다.

 

그 미소에 등교하던 아이들이 반응한다. 아침잠 덜 깬 아이들의 얼굴에 수줍고 희미한 웃음이 아침 서리마냥 맺힌다. '무리', '행렬'처럼 뭉뚱그려 흐리게 인식되던 학생들이 한 명 한 명 또렷한 이목구비와 생생한 색깔의 표정들로 보인다. 이토록 다채로울 수가 없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내 눈과 귀에 들어오는 듯하고 이를 한껏 받아 주고픈 의지가 힘을 얻는다.

 

피에르 쌍소가 이야기한 '듣기'가 떠오른다. SNS 속 불특정 다수의 낯선 이가 어떤 아이스브레이킹도 없이 불쑥 던지고 가는 댓글들, 한 번에 깊숙이 훅 들어오는 댓글들은 청자의 삶의 맥락과 흐름을 고려하지 않기에 강한 마찰과 굉음을 불러일으킨다. 그 굉음을 듣기란 너무 고통스럽고 지속적으로 듣다간 피로하여 마음과 몸을 상하게 된다. 청자는 귀를 막고 화자는 무시당함에 원한을 키운다. 피에르 쌍소는 화자와 청자 모두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자신 안에 서로의 말을 위해 내어줄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상대의 삶의 맥락과 흐름에 시나브로 젖어 들어 서로의 말을 담을 공간을 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더욱 풍요롭고 자유롭게 할 듣기가 가능해진다고 한다.

 

오늘 아침 학생 맞이 교문 생활교육 활동에서 울린 권태라는 알람은 매일 아침 동료들에 의해 전해지는 찻잔에 담긴 온기와 매일 등교하는 학생들 표정의 다채로움을 새롭게 음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맛과 멋, 온기에 시나브로 젖어 내 안에 동료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공간을 내어주도록 만들었다. 내 삶이 풍부해지고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권태가 끌어낸 듣기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