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호/교육현장엿보기] 우리는 점에서 만난다
김은애 하길고등학교 교사
“선생님, 좋은 소식 전해드립니다. 저 결혼합니다.”,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저 군대갑니다.”
“선생님, 저 과대표 되어서 연락드립니다.”, “선생님, 저 OO에 취직했어요!”
“드디어 OO에 합격했습니다!, 선생님!”
2008년 교직 생활을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가짐은 아이들에게 내가 줄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수업의 내용보다는 선생님의 호의, 눈맞춤이 기억에 남았던 것을 떠올리면 내가 수업의 내용보다는 관심과 같은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교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의 ‘사랑’이 어떻게 변질되고 어떤 식으로 퇴색되어 갔는지의 과정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학교 생활을 원만하게 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런 아이들은 바쁜 일과로 선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나에게 ‘기쁨, 열정, 사명감’을 일깨워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없던 사랑도 생기게 만드는 부류와는 다른 부류의 아이들에게도 그러한 사랑을 주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사랑이라고 표현했더라도 그것은 닦달, 채근, 그리고 한숨과 같은 형태로 발산이 되었다. 이를 사랑이라고 포장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찌됐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나의 표현이 그들의 성장에 어떠한 비료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교직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나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감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며, 이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선생님을 만난 것이 저에게는 행운이에요’라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고, ‘선생님 보면서 꿈을 키웠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 상황에 그 아이와 어떤 합이 맞았던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삼년 내내 말썽부리고 대드는 녀석이 있었다. 깜지를 쓰라고 하면 친구에게 대필을 시키던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밖에서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는 중에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고 내 차인 줄 착각하고 놀라서 빌딩 화장실에 숨었다가 학교에 들어오는 중에 결국은 나에게 걸렸다. 내가 아는 사실은 ‘무단 외출’인데 그 녀석의 진술로 인해 같이 나간 친구들의 ‘무단외출’과 ‘흡연’까지 들통이 났다. 지금도 그 아이의 진술서가 생각난다. 화가 나는 것보다는 웃겼다. 어찌됐든 그 녀석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했다. 졸업식 전에 학부모님과 통화한 내용이 아직도 기억난다. 학부모님과 서로 연신 고생많았다면서 서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중에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그 녀석은 잘 살고 있을 것이다.
2학년 때는 부모 속을 썩이며 방황하다가 3학년 때 교문 앞에서 행패부리는 행인을 친구들과 합심하여 퇴치해서 표창장을 받기도 한 애도 있다. 그 애는 대학에 가서 과대표가 되었다고 나에게 몇 년 뒤 문자를 보냈다.
월담을 하다가 떨어져서 뼈에 금이 간 아이는 담임인 나한테 혼날까봐 말은 못하고, 결국 몇 달 뒤에 학부모님이 입원한 병실에서 고백한 경우도 있었다. 그 아이는 몇 년 뒤 나와 동종 업계에서 일하게 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를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 가녀린 소년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청첩장을 나에게 보내 오고, 16년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큰 후회는 부모의 이혼을 막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그 소녀는 원하는 학과에 진학했다고 고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서두에 언급한 문자들은 아이들과 부대낀 1년이 아닌, 그 이후에 연락받은 내용들이다. 물론 연락을 안하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 모래를 손으로 움켜쥐었다가 펼치면 우수수 떨어지는 것처럼 남은 모래 알갱이 몇 개만 언급한 것이다.
교직 생활 중에 느낀 것을 단 하나로 말하자면, 학교에서의 1년은 점과 점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점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점은 선이 될 수도, 면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의 점이 육면체의 일부인지, 구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냥 점인지.. 그러니 함부로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을 고백한다.
대부분은 점으로 스쳐가는 인연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점일 순간이지만, 청소년기의 그들에게는 1년이라는 점은 느리게 그어지는 선과 같은 시간이다. 그리고 그 선은 정육면체의 모서리일 수도 있고 구의 표면 중 일부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선의 굵고 짧음, 약하고 짙음을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된다.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아이들도 변하고 나도 변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우리가 설령 서로를 찌르더라도, 너무 아파하지는 말자. 그 찌르는 것이 그 아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찌름은 영원한 가시가 아니라 매끈한 표면으로 닦여지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