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호/사무사] 자유의 역설
민주주의(democracy). 링컨은 이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정의했다.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체제들에 비해 가진 역사가 길지 않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발견되고, 그것이 정치체제로 자리 잡을 만큼 사람들의 인식에 일반화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다수에 의한 결정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현명한 소수의 사람들이 정치를 이끌었을 때 사회가 더욱 발전해 나갔던 사례들이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되기도 한다. 플라톤과 같이 이러한 이유로 민주주의를 맹렬하게 거부했던 학자들도 많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우리의 결정에 뼈아픈 책임을 져야 하더라도, 우리의 일에 똑똑한 몇몇의 뜻이 아닌 우리 모두의 뜻을 반영하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이 확신이 독점되어 있던 권리들을 한둘씩 보통 사람들에게 되찾아 오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잘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그것의 뿌리였던 ‘자유’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이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정치적 무관심’을 지목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서 관측되는 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다. 사람들은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 그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이해타산에 밝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다만, 정치에 참여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아닌, ‘정치적 게으름’이라고 칭해야 옳을 것이다. 정치 참여를 위해 내 친구와의 저녁 약속, 혼자 방에서 쉬는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느껴지면 분노한다. 그러고는 “그것 또한 나의 자유이다”, “참여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의사표시이다”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자유는 책임을 전제로 할 때 성립하는 가치이다. 누군가 자신을 의사결정으로부터 배제한 것이 아님에도,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참여하지 않은 의사결정에 대해 책임지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자유가 아닌 방임이며,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거부하는 태만이다.
교육기본법 제2조(교육이념)에서는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교과의 교육과정에서는 ‘민주시민의 태도와 자질의 함양’이 교육목표로 명시되어 있다. 예비 교사인 우리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학생들이 민주적인 삶, 곧 시민으로서의 덕성을 갖추고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자유’를 고찰해야 한다. 자유와 방임의 경계,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무엇인지를 말이다.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모순이다. 자유에 의한 민주주의의 붕괴 또한 모순이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자유’가 아닌 ‘게으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