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호/독자의시선] 열기구

김세연(미술교육·19) 학우

2023-09-25     한국교원대신문

 학교를 지나가는 45번 버스 안에서, 처음 보는 회색 맨투맨을 입고 교문을 내려오고 있던 너를, 나는 이미 보았다. 바나나 껍질에 몰려든 초파리들 마냥, 네 친구들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네 주변을 맴돌고 있었고 나는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은 틈 없이 무더웠고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쇳가루 같은 바람이 간간이 새어 들어왔다. 기대고 있던 의자에 이불처럼 동그랗게 앉은 할머니의 큰 통화 소리가 더운 공기 사이를 가득 메꾸었다. 백숙을 고아놨다는 덥디더운 대화와 뒤통수를 만지작대며 웃던 너의 모습이 창문 위로 반복 재생됐다. 너는 청바지를 입었고 머리는 이상하게 단정했고 친구들은 그런 너를 놀린 듯했고 나는 어색한 청치마를 만지작댔다.

 

“첫 주말 데이트에는 꼭 치마를 입어야 해.”

 

 친구들의 말에 옷장을 다 뒤졌던 내가 문득 떠오르자 괜히 무릎이 꿈틀댔다. 할머니의 팔에 걸려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내 무릎을 간질일 때마다 오늘 아침, 친구들을 만나 부산스럽게 치마를 빌려 입고 온 사실을 네가 절대 알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시내에 내릴 때까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새 사람이 탈 때마다 뜨거운 한숨들이 꿈틀꿈틀 터져 나왔다. 데워질 대로 데워진 더운 공기가 내 코를 거쳐 더 뜨거운 공기로 나간다. 이대로 내 얼굴이 열기구가 되어 둥둥 떠올랐으면 좋겠다. 때문에 네가 얼기설기 붉어져 있는 내 얼굴에 대해 묻는다면, 이 덥고 습한 버스를 투덜대야지.

 

“친구들이 새 옷을 빌려줬어.”

 

 어색한 공기를 만지작대며 네가 꺼낸 쑥스러운 첫 마디는 빳빳한 회색 맨투맨이었다.

 

‘이미 봤어.’

 버스에서 진즉 너를 봤다는 얘기는 꺼낼 수 없다. 제시간에 겨우 맞춰서 온 듯 급한 모양새로 뛰어온 내가 사실은 사십 분이나 일찍 와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의 무더운 기억이 스쳐 갔다. 괜한 비밀이 생긴 게 웃겨 웃음이 났다.

 

“니트 예쁘다.”

 

 낮고 더운 목소리. 내 웃음과 함께 낮고 더운 목소리가 말했다. 그 더운 말 공기가 내 우유색 니트를 뜨습게 데운다. 너는 꼭 아침부터 유난스럽게 빌려온 청치마가 아닌, 누런 이염을 두어 번 접어 올린 나의 흰 니트를 데운다. 언제 샀는지도 모를, 엄마 옷장에서 주워 온 나의 하얀 니트에 베인 달곰한 향수 냄새와 쿰쿰한 옷장 냄새가 괜히 부끄러워졌다.

 다시 무릎이 꿈틀거린다. 버스의 더운 공기와 이불 같은 할머니를 또 떠올린다. 나는 건조기에 돌린 옷처럼 덥게 부풀어 오르고, 너는 나를 보았다.

 

“가자”

 

주위의 따뜻한 공기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듯한 엉성하고 굼뜬 눈빛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오늘 열이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