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호/교수의 서재] 내가 바라본 역사, 네가 바라본 역사
대한민국은 점점 다양하고 많은 민족과 인종이 살아가고 있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수용을 외치지만 사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내가 바라본 역사만을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살아가는 만큼 수많은 역사가 우리나라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사건>을 통해 역사의 복수(複數)성을 말하고자 하는 김보현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교수님께서 학부 시절 감명 깊게 읽으셨던 책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인가요?
저는 정확히는 학부 시절이 아니라 석사 과정 중에 읽은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이라는 소설을 읽고 강렬한 느낌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쓰기’하고 있습니다. 1962년 알제리 독립까지는 이십여 년이 남아있는 시기, 알제리에서 프랑스인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이름 모를 피식민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는 겁니다. 독자로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관점의 역사와 마주하게 됩니다.
20세기 중반, 지중해 해변과 알제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같지만, <이방인>에서 ‘아랍인’이라는 정보 외에 밝혀진 것이 없었던 인물에게 <뫼르소, 살인 사건>은 ‘무싸Moussa’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서술하는 인물은 무싸의 남동생인 ‘하룬Haroune’입니다. 형의 부재와 그로 인한 어머니의 한을 평생 짊어진 채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하룬은 자신의 집안에 이런 비극을 초래한 뫼르소와 그 저자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룬이 이 이야기를 <이방인>을 완전히 전복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갓 독립을 이룬 알제리를 지탱하던 민족 이데올로기와 이슬람이라는 종교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면서, 하룬은 신기하게도 뫼르소와 같은 운명임을 깨닫고 그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살인으로 기소됐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신에 대해 초연함을 보였다는 이유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취약한 조건에 놓인 순간에도 천주교와 도덕규범이 휘두르는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이에 저항했지요. 이뿐만 아니라 비록 <이방인>은 ‘오늘, 엄마는 죽었다’로 시작하고 <뫼르소, 살인 사건>은 ‘오늘, 엄마는 살아있다’로 시작해서 두 이야기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뫼르소가 죽은 모친에 대해 냉담함을 보였듯, 소설을 잘 읽어보면 하룬도 뫼르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교수님께서는 그 책을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셨나요?
저는 불어불문학과 학부 시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마치 뫼르소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문장이 짧고 간결해서 당시에 프랑스어로 읽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소설이었어요. 그런데 학부 3학년 때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영국에서 한 학기를 보내던 중 알제리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이 친구들과 함께 알제리를 여행한 후부터 <이방인>이 다르게 읽혔던 겁니다. 알제리가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인식한 채, 그리고 그 땅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알제리 사람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채 읽는 이 소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어요. 그러던 중 석사학위 과정을 밟게 되었고, 알제리와 프랑스에 잠시 체류하던 2013년, 당시 프랑스에 있는 서점마다 진열되어 있던 <뫼르소, 살인 사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작품이 그 해에 ‘공쿠르 신인 문학상’을 받았거든요. 저는 이 책을 손에 넣자마자 게걸스럽게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기다렸던 소설이었기 때문이겠지요.
◇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거나 기억에 남는 구절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알제리 출신 카멜 다우드는 프랑스어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알제리 식민지에 식민자들이 남겨놓은 언어이지요. 언뜻 생각하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한다는 자체가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알제리가 여전히 프랑스에 종속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흔적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는데요, 카멜 다우드는 이 언어를 132년 식민주의 역사 끝에 프랑스가 남기고 간 주인 없는 재산에 비유합니다. 이 소설에서 인상 깊은 많은 구절이 있지만 아래 부분을 골라 소개합니다.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들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내 언어를 만들어 보려는 거지. 그의 언어는 내게는 주인 없는 재산인 셈이거든.” (p. 8-9)
◇ 그 책이 교수님께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이 책은 저에게 역사는 교과서에 적혀있거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역사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처럼 ‘보이도록’ 사후적으로 그리고 자의적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실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역사가 있는데 말이죠. 하나의 역사가 독단적으로 다른 역사를 침묵하게 해서는 안 되는데, 그렇다면 복수(複數)로 되어 있는 역사들에 대해 알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교과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무엇보다 그것들을 찾아내고 믿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한 줄기가 아니라 복잡다단한 뿌리처럼 엮여 있는 이 복수(複數)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짐짓 객관적인 듯한 태도와 어조로 과거를 가둬버리는 역사책이 아니라 허구에 기반을 둔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소설을 허무맹랑한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면서, 가령 신문 기사에 비해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요, 비록 두 소설 <뫼르소, 살인 사건>과 <이방인>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비록 실제로 일어난 사건, 즉 ‘사실’을 적어놓은 것은 아니더라도, 1940년대에서 1960년대에 프랑스 사람들과 알제리 사람들 사이에서 빚어진 무한히 많은 역사들에 그 어떤 신문 기사보다도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앞으로 한국 사회는 인구 구성에 있어서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모두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교사인 교원대 학생들이 이 급변할 사회를 주도하게 되겠지요. 역사의 복수(複數)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한국 사회의 새 구성원들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학급의 일원으로 포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대한 인식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가령 한국어는 한국 사람들의 것이고 다문화 가정 학생들은 남의 언어를 배워서 구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달리 생각하면 한국어는 한국어를 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 지배의 경험이 없는 한국은 이러한 복수성을 이해하고 개방성을 실천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갖춘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갖고 교편을 잡는다면, 한국은 새로운 변화에 현명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