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호/사무사] 괴롭힘의 악순환
“언제든, 누구든 그럴 수 있어. 나도.”
이번 여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D.P. 시즌2>에서 김루리 일병 총기난사 사건을 들은 준호가 “어떻게 그런 일이 생깁니까?”라고 묻자 기영이 답하는 대사이다. 이번 사무사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던,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었던 것들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괴롭힌다. 한 사람은 괴로워하고 있고, 한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한다. 괴롭힘은 권위를 동반하기에 자신은 물론, 주변인 누구도 그를 지켜 주지 않는다. 저항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괴롭힘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많아지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의 인격은 깊은 곳 끝까지 완전히 메말라 버린다.
2014년 4월, 선임병 4명에 의한 구타에 의해 일병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윤 일병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시신의 전신에서 심각한 구타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생전에도 치약 한 통을 통째로 먹이거나, 새벽 3시까지 기마자세를 시키는 등의 가혹행위를 지속적으로 당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윤 일병이 세상을 떠난 두 달 뒤에는 군대 내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병장이 총기난사 후 탈영하는 ‘임 병장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는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이라는 말이 떠돌곤 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직 군대에서만의 문제일까?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시대와 공간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모여 형성한 모든 종류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직장 내 괴롭힘, 가정폭력, 노인학대, 심지어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서조차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저 군대가 가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이라는 속성이 괴롭힘이라는 현상을 방해 없이, 보다 적나라한 방식으로 일어나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괴롭힘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고통스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힘과 위치를 과시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의 문제인 동시에, 그것이 계속 존속할 수 있도록 용인하는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결국 직접 괴롭힘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가해자가 무서워서, 혹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모르는 체했던 이들의 방관이 괴롭힘이 끝없이 재생산되도록 만드는 악순환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반복되는 괴롭힘 속에서 인격이 메말라 가던 이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자신을 지켜야겠다는 본능이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때로는 결국 스스로를 포기함으로써 이 고통을 멈추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역설적인 판단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한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구조도 변화하지 않는다. 괴롭힘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발견한 괴롭힘을 외면하지 않는 것, 내가, 그리고 이 사회가 괴롭힘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에서부터 사회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그 사람들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지켜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