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호/교수의 서재] 절대로 알지 못하는 마음, 그 산을 넘어서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 김연수의 중편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는 ‘그’의 여자친구의 죽음이 그런 것이고, 소설 속 ‘그’는 부재한 대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위해 정답과 오답 사이에 다채로운 발걸음을 디딘다. 국어교육과 김명훈 교수의 서재를 통해 읽기와 쓰기를 총동원해 도달하려 해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떠올려 보자.
Q1. 교수님께서 학부 시절 감명 깊게 읽으셨던 책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인가요?
제가 소개할 책은 한국 작가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입니다. 사실 처음 인터뷰 제안을 받고 학부 시절과 학부 시절 읽었던 책들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막연했습니다. 너무 먼 과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저의 학부 시절 책 읽기란 이 인터뷰의 질문처럼 감명 깊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는, 난폭하고 무절제한, 모든 책이 무차별화되는 그러한 읽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작가의 중단편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니까 그 내용을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크게 보아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다룬 작품들과 과거의 역사를 개별적인 시각으로 다시 쓴 이야기들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과 이별의 정서란 인류 보편의 경험이고, 삼국시대 혜초부터 1980년대 후반 민주화시대 대학생까지의 한국의 과거 역사를 다루는 책으로 실상은 전혀 다른 경향의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경향의 이야기 모두 아주 개별적입니다. 이 소설집이 들려주는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는 아주 개별적이고, 어쩌면 이런 것도 사랑인가, 싶은 경험들이거든요. 역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란 공식적인 대문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거든요. 성춘향이나 이몽룡이 아니라 변학도의 시각에서 다시 쓰는 남원고사, 안중근이 아니라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쏘지 못한 무명의 독립투사,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 병사,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유령 같은 존재들이죠.
이 책의 제목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인데, 표제작을 책의 제목으로 삼는 일반적인 소설집의 관례와는 달리, 이 책에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작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일종의 선언인 셈이죠. 지금부터 읽게 될 이야기는 유령작가(ghost writer)가 쓴, 유령들의 이야기야, 이런 뜻입니다. 고스트 라이터는 글을 쓰지만, 책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유명한 사람들의 자서전 같은 것을 대필해 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Q2. 교수님께서는 그 책을 언제, 어떤 계기로 만나게 되셨나요?
2005년 5월에 발간된 책이고, 저는 2005년 2월에 학부를 졸업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학부 시절이 아닌 대학원 과정 때 읽었던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학부 시절을 떠올리면 이 책이 먼저 생각납니다. 이 책을 만나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인데, 사실 어떻게 이 책이 제 책장에 꽂히게 된 것인지, 그 과정이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대학원 시절 초반에도 무질서한 읽기는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이 책 역시 아마도 그러한 읽기의 대상으로 선택되었으리라 짐작될 뿐입니다. 계기라는 것을 굳이 찾아야 한다면, 그건 도서관의 100번 대 서가에서 200번 대 서가로, 다시 800번 대 서가로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무작정 뽑아내 이해도 못한 채 읽어 대던 습관 때문이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순서가 되어서 읽게 된 거죠. 이런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닐 텐데, 하여간 학부 시절과 대학원 초반이 난폭하고 무질서한 책 읽기로 점철되었고, 김연수의 소설집은 그러한 저의 레이더에 걸려든, 순하고 창백한 한 마리 고라니였습니다.
Q3. 이 책이 교수님께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이 책은 저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걸까요? 그러니까 순하고 창백한 고라니 한 마리가 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새벽에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 학교 둘레길에서 만난 낯선 고라니 한 마리가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간혹 잠들지 못한 새벽, 불현듯 그 순하고 창백한 고라니 한 마리가 생각날 수도 있겠죠. 어쩌면 그 고라니가 나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김연수의 소설집도 저에게 그런 식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실린 중편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는 학부 시절의 저처럼 도서관을 떠돌면서 온갖 책들을 섭렵하는 한 대학생이 나옵니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의 대학생이라면 필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쳐야 했던 그 시절, 그는 친구와 선배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무시하고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동서고금의 연애소설을 읽습니다. 그는 최근에 여자친구로부터 실연당했습니다. 여자친구는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자살인데 왜 실연이냐 싶지만, 여자친구가 연인인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자살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이건 실연입니다. 여자친구에게 자신이 아무런 연을 갖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그래서 연애소설을 읽습니다. 여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버려진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동서고금의 연애소설을 읽다가 더 이상 읽을 소설이 바닥나자 도서관의 모든 책을 먹어 치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여자친구가 마지막으로 대출했던 책, 왕오천축국전의 번역본을 만나게 되고, 그는 난폭한 책 읽기를 그만둡니다. 그리고 글을 씁니다. 여자친구와 자기 경험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려 합니다. 물론 모든 기억과 기록을 총동원해도 여자친구가 왜 자신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는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읽고 쓰는 과정에서 그는 여자친구와 그가 도달했던 어떤 지점을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그곳은 혜초가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런 세계입니다. 읽기와 쓰기, 그 모든 것을 총동원해 도달하려 해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런 세계로 기울어진 그의 마음, 이런 것들이 이 책이 저에게 준 교훈입니다. 읽기와 쓰기가 직업이 된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제가 하는 일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해 준 책이 아닌가 합니다.
Q4.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또는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부분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세요.
중편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모든 문장은 어떤 결락을 채우기 위해 동원됩니다. 해석의 과정이죠. 여자친구의 유서에서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를 찾으려는 ‘그’, 왕오천축국전 122행의 소실된 글자를 채우기 위해 긴 주석을 달고 있는 ‘나’, 자살 직전 ‘나’가 주석을 단 왕오천축국전을 읽으며 엉뚱한 곳에 밑줄을 긋는 ‘여자친구’.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이렇듯 열심히 읽고 씁니다. 물론 ‘그’는 여자친구의 유서에 기록된 “없었습니다”라는 존칭과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을 채울 수 없었어요. 단지 그 틈 사이에 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는 점을 깨달을 뿐입니다. 왕오천축국전에 주석을 단 ‘나’ 역시 앞뒤 맥락을 통해 최선의 글자를 추정할 뿐,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문장은 원문이 될 수 있음”을 수긍합니다.
이 문장들이 위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때,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여 쓴 글이 교수님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점 난센스가 되어 나풀거릴 때, 이 문장들을 동원하여 위로를 삼곤 했습니다. 물론 이 문장들이 해석의 자유방임을 허락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선 곤란합니다. 그것보다는 무언가를 총동원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하겠죠. 마지막으로 여자친구 얘기를 해야겠네요. 여자친구는 왕오천축국전에서 무엇을 알고자 했던 걸까요? 그건 이 소설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여자친구는 ‘그’와 ‘나’가 채우려는 틈 그 자체를 상징하니까요.
Q5. 이 책은 어떤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이 책을 학부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학기가 끝나고 수강생 중 한 명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 책 얘기가 나왔습니다. “교수님, 요즘 애들은 이런 책 이해하지 못해요. 「동백꽃」이나 「소나기」처럼 유명한 소설을 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하하하 웃었지만 좀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연애소설을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의 연애가 궁금한 사람, 그리고 학부 시절의 저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그’처럼 도서관과 여자친구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있다면 그런 분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