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호/사무사] 당신의 세상은 얼마나 공정합니까

2023-03-27     편집장

“아, 왜 없는 것들은 인생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로 그려지는 인물인 ‘연진’의 대사이다. 그녀는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자수하면 복수를 멈추겠다는 동은의 제안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며 “오히려 이 악물고 팔자 바꿀 동기를 만들어 준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남편 도영이 피해자 유가족에게 사죄하고 죗값을 받으라고 말했을 때 역시 그녀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권선징악, 인과응보 따위의 정의(正義)는 인생에 없다던 그녀 역시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이 ‘공정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작중 연진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그만한 값을 치러 얻은 정당한 몫이라는 생각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영원히 견고할 것만 같았던 연진의 세상도 엄마 영애가 자신을 배신할 때,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의 세상 안에서 살아 주길 바랐던 딸 예솔이 “엄마, 친구 괴롭혔어?”라고 물을 때 산산이 무너져 내린다. 이때 연진은 마치 자신에게는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처참히 절규한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공정세상신념(belief in a just world)’라고 부른다. 세상은 공정하며,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믿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공정세상신념이 강한 개인은 불공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강한 동기를 가진다. 세상은 공정하다는 믿음이 불공정한 상황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려는 것이다.

인간에게 공정함은 때때로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임의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얻게 된, 받아 마땅한 몫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나쁜 일이 닥치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며 한탄한다. 마치 연진에게 자신의 행복은 당연한 것, 자신의 불행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혹자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정의라는 것이 실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도 한다. 누군가는 정의는 그저 마음가짐의 문제일 뿐이라 여기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믿었던 세상의 공정함에 배신당해 ‘정의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라는 회의주의에 빠져 버리기도 한다.

현실과 믿음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마다 그 정도는 다를지라도 세상이 나름의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결국 선이 악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도록 지켜 주는 강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공정하다는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일들이 현실에서는 수없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실망하고 좌절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의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의 손에 저절로 쥐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공정한 세상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나아가 그 세상이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정의로워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 방식은 다를지라도 현실의 부정의를 묵인하지 않고, 함께 분노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에 작지만 강한 힘을 보태는 것. 그것이 세상을 우리의 믿음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