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호/사무사] 세상을 지키는 꽃(花)이 되는 아름다운 화[禍]
20번째 사무사(思無邪)를 작성하며, ‘사무사’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봅니다.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 처음 사무사를 썼을 적에는 나쁜 일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것,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에서 없애는 것이 바른 생각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즉 내 감정을 배제한 중립적인 글, 그것이 바른 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고는 기자라는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스스럼없이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들과 그로 인해 피해받은 환경 약자들의 이야기, 여전히 이어지는 전쟁 속 사라진 평화와 차별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새로운 질병의 등장과 백신으로 드러나는 빈부격차에 관한 이야기, 대학언론에 대한 탄압과 이를 이겨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악성 댓글로 상처받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의 이야기,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아동 폭력과 관련한 이야기,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이에 관한 이야기, 여전히 선입견이라는 사회의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 장애인에 관한 이야기,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
2년간 세상을 바라보며, 또 그 세상을 글로 옮기며, 우리의 세상에는 아직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세상은 부정의하고, 그들이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견뎌 내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습니다. 그때에서야 ‘올바른 분노(憤怒)’를 알게 되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중립이 방관이 되어 그들을 향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약자를 보듬고 부정의에 소리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평화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그 시대에는 올바른 분노를 몸소 실천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잦은 전쟁과 제후국 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고통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당대의 백성들, 묵자는 그들의 아픔에 진정으로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당연했던 그때, 모든 사람의 앞에서 약자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소리쳤습니다. 맹자는 그러한 묵자를 보며, “겸애를 주장한 묵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摩頂放踵),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다(利天下爲之)”라고 말합니다. 물론 올바른 분노를 실천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약자들과 함께했던 사람들, 그들을 기억하며 다시 사무사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사악함이 없는 생각”. 이제는 사무사가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용기, 약자를 위해 세상에 소리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너머의 것을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기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세상의 부정의를 향한 정당한 화[禍]가 약자를 지키는 아름다운 꽃(花)이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지켜보고, 함께하고, 사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