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호/사설] 책임과 애도 사이에서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고·참사가 있었다.
12일 오전 9시 기준으로 157명이 죽고 197명이 다쳤다. 앞으로 사망자 수가 더 이상 늘지 않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번 사고·참사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 무거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으며, 한동안 아니면 평생 큰 짐을 마음에 또 하나 두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0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를 ‘국민애도기간’으로 정했다. 애도(哀悼, mourning)의 사전적 뜻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지만, 넓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의미 있는 것의 상실을 안타까워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사고·참사로 인해 우리는 소중한 우리 이웃들의 생명을 잃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정말 참된 애도를 하고 있는가? 아니, 국민들이 참된 애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가?
정부는 10월 31일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회의에서 ‘참사’ 대신 ‘사고’로, ‘피해자’ 대신 ‘사망자’로 용어를 통일하기로 했다. ‘참사 피해자’라는 용어를 회피하는 것은 누군가가 져야 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고·참사의 원인을 찾는 중에 경찰, 구청, 행정안전부, 대통령실 등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삶의 이유(why)를 아는 사람은 삶의 어떤 어려움(how)도 견디어 낼 수 있다.” 라는 유명한 니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반대로 이번 사고·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보며 우리는 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끊임없이 묻게 된다. 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우리가 제대로 알 수 없다면 소중한 이들을 떠나보낸 유족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은 나에게 도덕적 삶을 바라보게 하고, 도덕적 삶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때로는 명령한다고 주장한다. 충분히 애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연 우리는 이번 사고로 인해 죽고 다친 분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리고 충분히 애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가족들의 얼굴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이번 사고·참사의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을 보며 과연 이들이 고인들과 유가족들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쳐다봤는지 묻고 싶다. 고인들과 그 유가족들의 얼굴들은 우리에게 도덕적 삶을 요구하고 있다. 제대로 된 원인 규명이 있어야 우리는 안타까운 죽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죽임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는 충분한 애도 속에서 떠난 이들과 유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그 얼굴들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도덕적 삶을 위한 첫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