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호/교육현장엿보기] 비밀번호 2245725

최진영(일반사회·18) 졸업생

2022-10-17     한국교원대신문

비밀번호 2245725. 2, 3학년 생활지도 선생님들과 학교폭력 담당 선생님의 노고를 숫자로 변환한 것이다. 일종의 코딩이라고 해야 하나? 22년 학교폭력 신고 횟수 45, 3학년 생활교육위원회 7, 2학년 생활교육위원회 25. 듣기만 해도 아찔하다. 들판에 누워 별을 헤아리던 윤동주처럼, 나는 저 숫자를 들으면서 담당 선생님들이 작성해야 했을 문서의 개수를 헤아린다. 사건 하나에 사안조사보고서와, 사건 하나에 회의 녹취록과 사건 하나에 발송등기 둘과, 사건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동주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지만 우리는 남의 어머니와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게 약간의 차이일 따름이다. 전교생 600명 총 18학급의 학교 치고는 조금 과하지 않은가? 제철 대게도 이 정도로 속이 꽉 차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내가 맡은 1학년은 꽤 귀여운 편이다. 우리 반 학생들은 종종 나의 명령에 싫은데요?’라고 대꾸한다. 내가 가장 아끼는 한 학생은 내가 뭘 시키면 ‘X이라고 작게 속삭인다. 아주 깜찍하다. 물론 우리는 서로 꽤나 친해졌고, 서로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 삭힌 청어를 밀가루 반죽해서 빵으로 먹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 이게 남자중학교식 소통법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말만 저렇게 하지 큰 악의는 없다는 것만 인식하면, 학교생활은 크게 어렵지 않다. 우리가 친구에게 일상적으로 싫은데?’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들도 친구처럼 느껴지는 선생에게는 싫은데요?’라고 말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말을 어떻게 하든 시키면 다 한다. 남기면 남아서 청소도 하고, 영어단어를 써 오게 하면 다 채워서 온다. 1학년 학생들은 대체로 그렇다. 아직 큰 사고를 친 학생도 없다.

문제는 아이들이 점점 변하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들의 흑화는 1학년 학생들이 2, 3학년들과 관계를 맺게 되면서 시작되는데, 여러 가지 경로로 선배들과 새로운 관계를 트게 되면서, 선배들의 일탈 방법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흡수한다. 술과 담배를 사는 법, 걸리지 않고 피는 법, 일과 중에 담배가 피고 싶을 때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는 법, 미성년자가 술을 마셔도 내색하지 않는 모텔을 찾아내는 법 등이미 1, 2, 3학년 친구들이 다 함께 모이는 운동장 옆 벤치는 그 업계의 대치동이다. 대체 뭘 배우고 뭘 가르치는지를 모르겠다. 강 건너 불구경이던 것이 이제는 1학년의 영역까지 번져 오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오늘 2개의 등기를 발송하고 왔다. 1학기 내내 열리지 않았던 1학년 생활교육위원회가 담배와 술 때문에 하나둘 열리기 시작하는 중이다.

지도가 필요한 국면이다. 일반적으로 생활지도 담당들은 지도의 방법으로 공포를 활용한다. 이는 1학년 학년부장, 3학년 생활지도 선생님이 활용하시는 방법이다. 학생들이 교무실에 들어오면 표정을 구기면서 왜 왔어?’라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고, 그러면 학생들은 쭈그러든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중대한 하자가 있다. 결국 공포를 조성하는 데에는 물리력이 수반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학생을 때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3년간의 학교생활 끝에 공포탄은 나를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은 3학년들의 태도가 이를 방증한다. 그들은 이제 선생님에게 쫄지 않는다. 혼내면 그냥 뒤돌아 나가 버리면 되는데, 누가 나를 막을 것인가? 1학년도 슬슬 기미를 보이고 있다. 예전에는 그런 호통에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제는 슬슬 벤치 학습의 효과가 나타나는 중이다.

결국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폭력이 거세된 학교에 걸맞은 새로운 생활지도. 나는 그 해답이 따스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물러터진 방법이라고,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거라고 말하지만, 나는 한없이 드세 보이던 학생들이 약할 땐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주변에 믿을 만한 어른,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없는 아이들이 많다. 이들은 부모와 선생님들은 자기에게 화만 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학교에 적응할 생각도 없고, 자신들에게 힘이 생기면 반항하기 일쑤다.

아이들의 무례를 단죄해야 할 죄악으로 보지 않고, 일단은 그것을 남자 중학생식 소통법이라 여기며 있는 그대로 받아 주는 것.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믿을 만한 유일한 어른이 되어 주는 것. 행동의 교정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을까.